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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파일:Guerre de cent ans (1435).svg|right|thumb섬네일|1435년 백년 전쟁 상황 지도. 붉은색이 잉글랜드 영역이고, 푸른색이 프랑스 영토이다.]]
 
[[백년 전쟁]]은 1337년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간에 분쟁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발발하였다. 참고로 백년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중간 중간에 가끔씩 휴전 기간이 있기도 하였다. 거의 모든 전투는 프랑스 영토 내에서 일어났으며, 잉글랜드군의 공격과 횡포로 인하여 프랑스 경제는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ref>John Aberth. ''From the Brink of the Apocalypse'',Routledge, 2000 {{ISBN|0-415-92715-3}}, 9780415927154 [http://books.google.co.uk/books?id=4xyp-SscNBkC&pg=PA85 p. 85]</ref> 프랑스 인구수는 이전 세기에 휩쓸었던 [[흑사병]]의 피해 이후 아직 회복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으며, 상인들은 외국 시장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잔 다르크가 등장할 무렵에 잉글랜드는 이미 프랑스 영토를 거의 점령하였으며, 프랑스는 거의 30년 동안 단 한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실정이었다. 역사학자 켈리 드브라이스는 “13세기 프랑스 왕국에는 그림자만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라고 표현하였다.<ref>DeVries, pp. 27–28.</ref>
== 생애 ==
=== 어린 시절과 하느님의 계시 ===
[[파일:Maison J dArc.jpg|thumb섬네일|잔 다르크의 생가. 현재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이용 중이다.]]
[[파일:La vision et l'inspiration de Louis-Maurice Boutet de Montvel.jpg|thumb섬네일|250px|right|성 미카엘과 성녀 가타리나, 성녀 마르가리타로부터 하느님의 계시를 받는 잔 다르크. 1911년 그림.]]
잔 다르크는 프랑스 동부의 바 공작령(오늘날의 로렌 주)에 있는 작은 마을 동레미(오늘날의 동레미라퓌셀)에서 자크 다르크와 이사벨 루미의 딸로 태어났다.<ref>Condemnation trial, p. 37.[http://www.fordham.edu/halsall/basis/joanofarc-trial.html] . Retrieved 23 March 2006.</ref> 잔 다르크의 부모는 약 50에이커(20헥타르) 정도 되는 땅을 소유하였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농사 외에도 마을의 말단 관리로써 세금 징수와 치안을 담당하였다.<ref>Pernoud and Clin, p. 221.</ref> 당시 동레미가 있는 지역은 부르고뉴파의 영토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프랑스 왕가에 대해 변함없이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잔 다르크가 어린 시절에 몇 번 적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한 번은 그녀가 살던 마을이 불태워진 적도 있었다.
 
 
=== 도팽과의 만남과 시험 ===
[[파일:Coat of Arms of Jeanne d'Arc.svg|thumb섬네일|잔 다르크의 문장]]
 
로베르 드 보드리코르는 지속적인 잔 다르크의 열정에 감동하여 결국 그녀에게 호위를 붙여 시농으로 갈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잔 다르크는 남장을 하고 적대 세력인 부르고뉴 영토를 가로질러 시농 성으로 갔다.<ref name="Richey">Richey, p. 4.</ref> 시농에 있는 프랑스 궁정에 도착한 잔 다르크는 도팽 [[샤를 7세|샤를]]을 알현하였다. 반신반의하던 도팽은 잔 다르크를 직접 만나본 후에 그녀의 도덕심과 의지에 감탄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팽은 과연 잔 다르크가 하느님이 보낸 사자인지를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옷을 시종에게 입혀 옥좌에 앉혀놓고 자기는 변장을 한 채 가신들 속에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초라한 차림의 도팽 앞으로 다가가 경의를 표했다는 것이다. 한편, 도팽 샤를의 장모인 [[아라곤의 욜란다]]는 오를레앙을 구원하기 위한 원정대를 편성하기 위한 자금을 대주고 있었다.
 
[[파일:Picardie Compiègne8 tango7174.jpg|thumb섬네일|left|프랑스 생자크 성당에 있는 스테인드글래스. 출정식에 앞서 영성체를 하는 잔 다르크가 묘사되어 있다.]]
 
잔 다르크는 도팽 샤를에게 자신에게 기사가 착용하는 갑옷과 무기는 물론 군대를 이끌 수 있는 지휘권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잔 다르크는 자신의 갑옷과 말, 칼, 깃발 등의 군사 원정 시 필요한 물품들을 모두 기증을 통해 어렵게 받았다. 역사학자 스티븐 W. 리키는 프랑스 왕실이 잔 다르크의 주장에 동조하여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이유에 대해서 당시 거의 붕괴하기 일보 직전에 있었던 프랑스 왕실에 있어서 잔 다르크가 이러한 난국을 타개해줄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 활약 ===
[[파일:Scherrer_jeanne_enters_orlean.jpg|thumb섬네일|오를레앙 방어전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는 잔 다르크. 장 자크 셰러의 작품.]]
 
1429년 4월 29일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군의 포위를 받은 오를레앙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오를레앙을 지키는 프랑스군 지휘관이었던 장 도를레앙은 그녀를 전투회의에서 배제시키고 적군과 교전할 때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 등 무시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회의 및 전투에 참여하려고 노력하였다. 사실 잔 다르크의 실제 군사적 지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역사학계 내에서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전통적인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잔 다르크가 순전히 앞에서 깃발을 휘두르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라는 의견이 많다.<ref>Perroy, p. 283.</ref> 이러한 견해는 그녀가 마녀재판을 받을 당시 재판관에게 한 진술을 토대로 한 것이다. 당시 재판장에서 잔 다르크는 자신은 칼보다는 군기를 더 선호한다고 증언하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잔 다르크가 군 지휘관으로서 통솔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수준급의 전략가로 보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례로 스티븐 W. 리키는 잔 다르크가 “전쟁의 흐름을 뒤바꾼 놀라운 일련의 승리들 속에서 군대를 계속해서 이끌었다.”라고 평가하였다.<ref name="Richey"/> 그러나 잔 다르크가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불리하던 전세를 뒤엎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ref>Pernoud and Clin, p. 230.</ref>
잔 다르크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프랑스군은 오를레앙에서 크게 승전을 거두었다. 잉글랜드군은 기세가 오른 프랑스군이 파리나 노르망디를 재탈환하기 위해 나설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이러한 잉글랜드의 예상을 깨고 도팽 샤를의 [[대관식]]을 위하여 [[랭스]]를 탈환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루아르 강 인근에 있는 교량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잔은 이러한 자신의 계획을 도팽에게 설명하면서 [[장 2세 (알랑송)|알랑송 공작 장 2세]]와 더불어 프랑스군의 지휘권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주장은 굉장히 대담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랭스는 파리보다 약 두 배나 더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적군의 영역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f>DeVries, pp. 96–97.</ref>
 
[[파일:The Maid of Orléans.PNG|thumb섬네일|left|1429년 잔 다르크의 랭스 입성. [[얀 마테이코]]의 작품.]]
[[파일:Notre Dame de Reims - détail haut.JPG|upright|thumb섬네일|[[랭스 대성당]]. 전통적으로 이곳은 역대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열렸던 곳이다. 샤를 7세의 대관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파일:Jeanne d'Arc - Panthéon III.jpg|left|thumb섬네일|샤를 7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잔 다르크. [[팡테옹]]의 벽화.]]
 
도팽의 허락을 받은 잔은 군대를 이끌고 6월 12일에 자제오를, 6월 15일에 멍서르와르를, 그리고 6월 17일에는 [[보장시]]를 탈환하였다. 처음에는 잔을 못미더워하던 장 도를레앙을 비롯한 다른 지휘관들도 오를레앙에서의 그녀의 활약에 깊은 인상을 받고 결국 그녀의 열렬한 지지자로 선회하였다. 알랑송 공작은 잔이 와서 그에게 대포가 곧 날아와 덮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재빨리 피신시켜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며 그녀에게 감사해하기도 하였다.<ref>[http://www.stjoan-center.com/Trials/null07.html Nullification trial testimony of Jean, Duke of Alençon]</ref> 한편 잔은 전투 와중에 성곽공격용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가 적군의 투석기가 쏜 돌멩이를 머리에 맞고도 버텨냈다. 6월 18일 존 패스톨프 장군이 이끈 구원군이 도착해서 잉글랜드 방어군에 합류하였다. 파타이 전투는 흡사 아쟁쿠르 전투와 비견될 수 있는데, 결말은 정반대였다. 잉글랜드 궁수들이 수비 준비를 채마치기도 전에 프랑스 선발대가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잉글랜드군의 주요 전력이 모조리 분쇄되고 지휘관들의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사로잡힘으로써 잉글랜드의 패배로 끝나버렸다. 지원하러 온 존 패스톨프는 살아남은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달아나버렸다. 반면에 프랑스군은 거의 손실을 입지 않았다.<ref>DeVries, pp. 114–115.</ref>
 
=== 재판 ===
[[파일:Tour Jeanne D'Arc10.jpg|thumb섬네일|upright|[[루앙 성]]의 감옥은 잔 다르크가 재판 중에 수감되었던 곳으로 이후 잔 다르크 탑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잔 다르크에 대한 재판은 명목상으로는 그녀의 이단성 시비여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로 열린 것이다. 베드포드 공작은 조카인 헨리 6세의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잔의 활약으로 맞수인 샤를 7세가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잔에 대해 앙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잔을 이단 혐의로 공격하는 것은 곧 그녀가 옹립한 샤를 7세의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잔 다르크에 대한 종교재판은 1431년 1월 9일 잉글랜드의 점령지역인 [[루앙]]에서 열렸다.<ref>Judges' investigations 9 January&nbsp;– 26 March, ordinary trial 26 March&nbsp;– 24 May, recantation 24 May, relapse trial 28–29 May.</ref> 하지만 이 재판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많은 재판이었다.{{중립 필요 문장|날짜=2016-2-2}}
 
[[파일:joan of arc interrogation.jpg|thumb섬네일|left|upright|잉글랜드의 [[헨리 보퍼트]] 추기경에게 심문을 받고 있는 잔 다르크. [[이폴리트 들라로슈]]의 그림.]]
 
그 가운데 몇몇 주요 문제점들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교회법상 코숑 주교는 종교재판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ref>The retrial verdict later affirmed that Cauchon had no authority to try the case. See also ''Joan of Arc: Her Story'', by Regine Pernoud and Marie-Veronique Clin, p. 108. The vice-inquisitor of France objected to the trial on jurisdictional grounds at its outset.</ref> 그런 그가 종교재판관이 된 것은 잔에 대한 종교재판에 자금을 대준 잉글랜드 정부의 지지를 등에 업은 덕분이었다. 잔에게 불리한 증언을 모으는 일을 위탁받은 성직공증인 니콜라스 바이는 잔에게 불리한 증언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찾지 못하였다.<ref>[http://www.stjoan-center.com/Trials/null03.html Nullification trial testimony of Father Nicholas Bailly]</ref> 이렇게 잔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재판이 강행되었다. 나중에 법정 서기들은 상부의 강압에 못 이겨 재판 기록을 잔 다르크에게 불리하도록 일부 날조했다고 고백했다. 심지어 잔에게는 자문관이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교회법을 또 한 번 위반하였다. 법정에는 그녀를 도울 증인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1차 공개심리 때, 잔은 법정에 출석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반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프랑스 측의 성직자들도 마땅히 이 법정에 초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ref>Taylor, Craig, ''Joan of Arc: La Pucelle'' p. 137.</ref>
 
=== 처형 ===
[[파일:Joan of arc burning at stake.jpg|thumb섬네일|180px|화형당하는 잔 다르크. [[쥘 외젠 르느뵈]]의 그림.]]
 
[[이단]]은 초범인 경우에는 경범죄에 해당하지만, 재범인 경우에는 중죄로 다루어졌다. 잔은 각서에 서명할 때 여성의 옷을 입는 것에 동의하였다. 며칠 뒤에 법정에 선 그녀는 재판관에게 ‘고귀한 혈통을 지닌 잉글랜드의 귀족이 감옥에 들어와서 자신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했다.’라고 말했다.<ref>See Pernoud, p. 220, which quotes appellate testimony by Friar Martin Ladvenu and Friar Isambart de la Pierre.</ref> 결국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더군다나 여성의 옷을 빼앗겨 달리 입을 옷이 없었기 때문에 잔은 다시 남성의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ref>[http://www.stjoan-center.com/Trials/null02.html Nullification trial testimony of Jean Massieu]</ref>
 
== 사후 복권 ==
[[파일:Joan of Arc-Notre Dame.jpg|thumb섬네일|upright|right|[[노트르담 드 파리 대성당]] 안에 있는 잔 다르크 석상.]]
 
백년 전쟁은 잔 다르크가 사망하고 나서도 22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샤를 7세는 맞수인 헨리 6세가 열 번째 생일을 맞아 1431년 12월 대관식을 가졌지만,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자신의 정통성을 지키는데 성공하였다. 잉글랜드는 1429년에 상실한 군사적 우위를 다시 쌓아올리기도 전에 1435년 [[아라스 조약 (1435년)|아라스 조약]]으로 인하여 부르고뉴파와의 동맹이 와해되고 말았다. 같은 해에 베드포드 공작이 사망하고, 헨리 6세는 섭정 없이 잉글랜드를 통치한 역사상 가장 젊은 왕이 되었다. 유약한 성품에 지도력도 높지 않았던 헨리 6세 덕분에 두 나라간의 분쟁은 더 빨리 끝날 수 있게 되었다. 켈리 드브라이스는 잔 다르크가 고안한 포격술과 적극적인 전방공격은 프랑스군의 전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남은 전쟁기간에 효과적인 전술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ref>DeVries, pp. 179–180.</ref>
 
== 시성 ==
[[파일:Paris_75001_Place_des_Pyramides_Jeanne_d'Arc_equestre_by_Frémiet_S1.jpg|thumb섬네일|left|[[프랑스]] [[파리 시|파리]] [[피라미드 광장]]에 있는 잔 다르크 기마상]]
 
잔 다르크는 16세기에 [[가톨릭 동맹 (프랑스)|가톨릭 동맹]]의 상징으로 두각이 되었다. 1849년 [[펠릭스 뒤팡루]] 주교가 오를레앙 교구장에 착좌하면서 잔 다르크를 열렬하게 찬양하였는데, 당시 그의 강론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백년 전쟁 당시 프랑스의 적국이었던 영국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아 화제가 되었다. 펠릭스 뒤팡루 주교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1909년 잔 다르크는 [[로마 교황청]]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20년 5월 16일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잔 다르크를 [[성인 (종교)|성인]]으로 시성하였다. 성인이 된 잔 다르크는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공경을 받는 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톨릭교회 내에서 잔 다르크는 라틴어식 명칭인 아르크의 요안나 또는 요안나 아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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