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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파일:Joeseon Sejo01.jpg|thumb섬네일|left|140px|[[조선 세조]]]]
 
세종과 문종의 사후 어린 단종을 대신하여 관료들과 외척들이 발호하였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왕숙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이 두각을 드러냈으며, [[계유정난]]을 빌미로 반정의 명분을 삼았다.
[[조선 단종|단종]]이 즉위하였을 때는 나이 겨우 12세에 불과하여, 부왕이자 선왕인 문종의 유명(遺命)에 따라 좌의정 [[김종서 (1383년)|김종서]]과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 등이 그를 보필하고, [[집현전]] 학자들이 또한 협찬(協贊)하여 왔다.
 
[[파일:Joseon-Portrait of Shin Sukju.jpg|thumb섬네일|right|140px|[[수양대군]]의 책사 [[신숙주]]]]
 
그런데 단종의 조부인 [[조선 세종|세종]]에게는 왕자 18명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세종의 차남이자 [[양녕대군]], [[효령대군]]과 함께 종친들의 수장격인 [[수양대군]]은 야망과 수완이 비범한 인물이었다. 이때 모든 대군은 다투어 빈객을 맞아들여 세력의 확장을 도모하고 있었는데, 수양대군에게는 무인들이 모였다.
이 일이 있은 뒤 세조는 성삼문 등의 이 밀로에 상왕 단종도 관계하였다 하여 강봉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삼아 군사 50명으로 호송케 하여 영월로 귀양 보내고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를 추폐(追廢)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도 순흥(順興)으로 귀양 보냈다.
 
[[파일:Stale of Gumseong Daegun.jpg|thumb섬네일|[[금성단]] 안에 있는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그 후 9월에 [[금성대군]]은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여 영남 인사에게 격문(檄文)을 돌려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밀고가 들어가 탄로 나서 금성대군은 안동에 하옥되고, 이보흠과 기타 영남의 인사들도 많이 주살(誅殺)되었다. 한편, 세종의 아들 [[한남군]](漢南君)·[[영풍군 (왕족)|영풍군]](永豊君) 등도 멀리 귀양 가고 노산군에 대하여는 군(君)을 폐하여 서인으로 하였다. 이에 영의정 정인지·좌의정 [[정창손]]·이조판서 [[한명회]]·좌찬성 [[신숙주]] 등은 계속 노산군(단종)과 금성대군을 치죄할 것을 주장하여, 세조는 마침내 금성대군을 사사(賜死)하고 불과 이때 나이 17세였던 단종 역시 사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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