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1세 (카스티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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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비데로궁전은 존재하지 않는 궁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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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엔리케 4세에게 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가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어 왕위를 계승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귀족들은 이사벨의 이복 오빠인 엔리케가 정신질환이 있는 점과 두 번의 결혼에도 계속 불임이었던 점을 이유로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의 계승권을 부인했다. 일부 가신들은 현 국왕의 이복 남매인 이사벨과 알폰소를 다음 국왕 자리에 앉히려고 마음먹었다.
 
[[파일:Isabel_firma.jpg|left|250px|thumb섬네일|이사벨 1세의 필체 서명]]
 
=== 결혼 ===
[[1464년]], 알폰소의 즉위식이 거행되었으나 한 나라에 왕이 두 명이나 있는 상황이었기에 심각한 국론 분열이 일어났다. 이 상태는 [[1467년]]에 알폰소가 죽음으로써 종지부를 맞는다. 알폰소의 지지자들은 이사벨을 다음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지만, 이사벨은 “오라버니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겠다.” 라는 식으로, 이복오빠의 친딸인지 불분명한 후아나보다는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기에 더 합당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보이는 식으로 거부를 했다. 그 덕분에 이사벨은 엔리케 4세의 눈에 들게 되어 1468년 9월 19일 토로스 데 귀산도 협정에 따라 왕위계승자로 인정받았다.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을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혼인시키고자 하였으나 정작 이사벨은 선교사를 보내 알아본 다음, 동맹상대로서는 포르투갈보다는 [[지중해]]의 영해권을 소유한 [[아라곤 왕국]]이 제격이라 판단하고 자신의 결혼상대자로서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를 선택했다. 더군다나 아라곤의 카스티야는 민족도 거의 같고, 왕조도 같은 트라스타마라 왕조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몰래 만나 1469년 [[바야돌리드]]에 있는 후안 데 비베로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474년에 엔리케 4세가 사망하자 이사벨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파일:Isabel la Católica 01b.jpg|left|160px|thumb섬네일|이사벨 1세의 석상]]
 
== 통치 ==
여왕이 된 이사벨 1세는 우선은 후아나와 약혼한 후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해 온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 [[1479년]] 2월 24일에 승리한 후, 카스티야 영내의 반(反)이사벨 기치를 내세운 친(親)후아나 세력을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토벌해가기 시작했다. 같은 해 남편 페르난도가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라곤의 왕위를 계승하자 [[1492년]]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 즉 [[스페인]](에스파냐) 왕국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스페인은 아직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군주끼리 결혼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군주의 공동통치제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아직도 제각기 두 군주의 통치를 받았다. 이는 훗날 이사벨이 죽은 후에 상속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사벨은 자신은 왕비가 아니라 여왕이며, 페르난도보다 더 연상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파일:La Rendición de Granada - Pradilla.jpg|thumb섬네일|180px|'''[[그라나다 함락]]''': 백마에 탄 여인이 이사벨]]
1492년 1월,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아직 남아있던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을 제압, 마침내 800년에 걸친 [[레콩키스타]]를 마무리 지었다. 당시 [[무슬림]]과의 전쟁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사벨은 전장을 누비는 남편을 위해 군자금과 물자 조달 등에 국력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 위업 덕분에 1496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부터 칭송받은 두 사람은 [[가톨릭 공동왕]](''Los Reyes Católicos'')이라는 칭호를 하사받게 된다. 이후 이사벨은 ‘가톨릭교도 이사벨’(''Isabel la Católica'')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또한 이사벨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콜럼버스]]의 신대륙 진출을 돕기 위해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스페인에 해외 식민지 개척시대가 도래하였으며,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치세를 스페인의 황금시대로 정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콜럼버스를 시작으로 수많은 모험가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되어 그 곳으로부터 얻은 수많은 재물을 통해 스페인은 매우 부유해졌다.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던 이사벨은 훗날 원주민들에 대한 잔혹한 처사에 매우 마음 아파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