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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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은 [[1885년]] 함북 [[명천군]] 하우면 하평리에서 [[향반]]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5년]] 10세 때 아버지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와 광화문 인근에 있는 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신설된 관립재동소학교에 입학하였고, [[1899년]]에는 한성중학교로 진학하여 신학문을 익혔다. 이 무렵 허헌의 아버지 허추(許抽)는 [[궁내부]] 경위원에 근무했다고 한다. 그런데, 허추는 건강이 나빠져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기로 결정하고 아들 허헌을 [[이용익]]에게 맡겼다. 어린시절 허헌은 [[이용익]]의 사랑채에 기거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파일:Heo Jong-suk.png|thumb섬네일|160픽셀|딸 [[허정숙]]<br />(본부인 정보영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다.)]]
 
아버지 허추가 병사하고 부친상 3년상을 치르고 난 뒤 허헌은 견문을 넓힌다는 생각으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트크에 다녀왔고 돌아오는 길에 [[청진]]의 친지인 강씨를 찾아가 다시 [[한성부]]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재력가인 강씨는 당나귀 두마리와 엽전 한 꾸러미를 학자금으로 주었다고 한다. 그가 고향인 함북 명천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장가 들기를 권해 함흥에 사는 정보영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ref name="생애 초기">《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서》, 이이화 저. 김영사. p336 ~ p339</ref> 정보영에게서 얻은 자녀들 중 딸 [[허정숙]]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고, [[허정숙]]은 후일 [[일제 강점기]]의 여성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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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일주 여행 ====
[[파일:허헌 출국.JPG|left|thumb섬네일|300px|1926년 5월 30일자 동아일보. (좌열 좌측에서 네 번째가 허헌이다.)]]
{{위키문헌|허헌 세계일주 기행(1회)}}
{{위키문헌|허헌 세계일주 기행(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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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가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허정숙과 함께 미국 가는길에 올랐다. 그는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을 6개월 동안 돌아보고 나서 딸을 미국에 남겨두고 발길을 [[유럽]]으로 돌렸다. 그는 미국 유학의 꿈을 접고 여러 나라 사찰에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스위스]], [[바이마르 공화국|독일]],[[소련]], [[중국]] 등 대륙횡단 여행을 6개월동안 하고 돌아왔다.
 
[[파일:허헌 귀국.JPG|right|thumb섬네일|300px|1927년 5월 14일자 동아일보. 허헌이 아일랜드에서 겪은일을 기행문으로 쓴 글.]]
당시 대륙횡단 여행을 하는 사람이 손에 꼽힐 정도로 흔치 않아서<ref>다른 세계일주 여행자는 [[인촌 김성수]], [[최린]]이 있었다.</ref>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의 여행기는 [[삼천리]] 잡지에 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ref name="독립 운동"/><ref>[http://db.history.go.kr/front/srchservice/srcFrameSet.jsp?pSearchWord=DLCODLCCGGIGCHJOACCKCNNCCOFC&pSearchWordList=DLCODLCCGGIGCHJOACCKCNNCCOFC&pSetID=-1&pTotalCount=0&pSearchType=1&pMainSearchType=2&pQuery=GGIOGGKIGGKPGGJAGGIODLCODLCCGGIGCHJOACCKCNNCCOFCGGIPGGIP&pSearchClassName=&oid=&url=&method=&lang=&code=&searchword=&return= 허헌 세계일주]</ref>
 
==== 신간회 활동 ====
[[파일:신간회 창립.jpg|thumb섬네일|250px|left|[[신간회]] 창립 모습 (1927년 2월 14일)]]
{{참고|신간회|근우회}}
귀국한 이후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피선되어 민족단일당(民族單一黨) 결성과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신간회]]에서 허헌은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청년운동, 형평운동 등의 단체와 연계를 추진해 강연을 여러번 나서면서 활동했다.<ref name="독립 운동"/> 그러나 [[신간회]] 서울지회장에 선출된 [[조병옥]](趙炳玉)이 허헌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의 [[신간회]] 가입이 무산되면서 여기에 반발한 [[신간회]][[광주]], [[목포]]등의 지회가 이에 가세하여 내분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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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정국에서 ===
==== 건준과 인공 내각 ====
[[파일:Preparatory Committee for National Construction in Chemulpo.JPG|thumb섬네일|200px|미군을 환영하는 인천 제물포 지부 건국준비위원회 회원들]]
[[파일:허헌선생.jpg|썸네일|왼쪽|허헌]]
{{참고|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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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주의 민주전선 ====
[[파일:미소공위 환영 시민대회.jpg|썸네일|250px|right|제1차 [[미소공위]] 환영 시민대회 집회에서. 왼쪽부터 [[김원봉]],허헌,[[박헌영]].]]
[[파일:1946 10 朝鮮共山黨 昌建記念日 朴憲永.jpg|thumb섬네일|160px|right|1946년 서울의 조선공산당 창건 2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박헌영]](중)과 허헌(왼쪽)]]
{{참고|민족주의 민주전선|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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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 정부 수립 활동 ====
[[파일:1947 at the Soviet-US Committee.jpg|thumb섬네일|200px|left|[[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우사|김규식]],이묘묵,말리크, [[테렌티 스티코프]](소련군정 사령관), 허헌(맨 왼쪽)]]
허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공개적으로 부정하였다.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음을 주지시키며 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라고 비난했다.<ref name=donga/>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법통 부정 이후 그는 극우단체의 공적으로 성토되었고, 테러의 주된 표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우익 청년단체의 습격과 테러를 피해 여러번 거처를 옮겨다녀야 했다. 한편, 허헌은 해방 정국 정치정당에 가입하지 않고 개인자격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