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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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조지아의 콜키스 왕국과 이베리아 왕국 ===
[[파일:Ancientcolchisandiberia_andersen.png|thumb섬네일|200px|left|고대 조지아의 콜키스와 이베리아 왕국]]
두 번째 조지아 부족은 연맹이 기원전 13세기에 서조지아가 흑해 연안에 나타났고 [[콜키스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ref>BRAUND, D., ''Georgia in antiquity: a history of Colchis and Transcaucasian Iberia 550 BC – AD 562'', Oxford University Press, 1996</ref><ref>Oliver Wardrop, The Kingdom Of Georgia: Travel In A Land Of Women, Wine And Song (Kegan Paul Library of History and Archaeology)</ref> BCE 6~1세기에 존재한 콜키스 왕국은 최초의 국가 형태로 여겨지며 ''콜키시안''이라는 용어는 흑해 동부 연안에 거주했던 밍그렐리아족, 라즈족, 찬스족과 같이 고대 조지아-카르트벨리아 부족들의 총체적인 용어이다.<ref>Modern Hatreds, Symbolic Politics of Ethnic War, Stuart J. Kaufman p. 91.</ref><ref name="Modern Hatreds p. 91">Modern Hatreds: The Symbolic Politics of Ethnic War, Stuart J. Kaufman, p. 91</ref><ref name="Modern Hatreds p. 91"/><ref>Georgia in Antiquity: A History of Colchis and Transcaucasian Iberia, 550 BC-AD 562, David Braund Oxford: Clarendon Press, 1994. Pp. 359</ref><ref>
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Ronald Grigor Suny, p. 13</ref><ref>Cyril Toumanoff, Studies in Christian Caucasian History, p 69</ref><ref>One Europe, Many Nations: A Historical Dictionary of European National Groups, James Minahan, p. 282</ref><ref>[http://bse.sci-lib.com/article063055.html The Great Soviet Encyclopedia:Значение слова "Колхи" в Большой Советской Энциклопеди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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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이베리아와 콜키스 정복 ===
''{{본문|로마의 조지아}}''
[[파일:Georgianiberia andersen565.JPG|thumb섬네일|left|고대 조지아의 이베리아 왕국]]
[[파일:Spruner von Merz, Karl; Menke, Th. 1865. Albania, Iberia, Colchis, Armenia, Mesopotamia, Babylonia, Assyria (B).jpg|thumb섬네일|left|콜키스와 베르[이베르(이아)] 왕국. "atlas antiquus", 1865년]]
[[파일:Roman-Persian Frontier, 565 AD.png|thumb섬네일|left|565년에 동로마 제국의 라지카 속주]]
아르메니아와의 단절된 관계로 그 무렵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당시에 있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나라를 침략([[기원전 65년]])하게끔 했다. 그러나 로마는 이베리아 전역에 그녀의 지배력을 수립하지 않았다. 19년 후에, 로마는 [[캅카스 알바니아|알바니아]]와의 대결 작전을 위해 그들의 군사들과 [[파르나바즈 2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이베리아를 다시 지나갔다([[기원전 36년]]).<ref>Braund, D., Georgia in Antiquity: A History of Colchis and Transcaucasian Iberia 550 BC – AD 562,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p 36</ref>
 
[[파일:Ashotkurapalatgeorgia.jpg|200px|thumb섬네일|right|[[이베리아의 아쇼트 1세|아쇼트 쿠로팔라테스]], 조지아의 첫 번째 [[바그라티오니 가|바그라티오니]] 왕, 829년]]
그 기간 동안에는, 아르메니아와 폰투스가 동부 지중해 전체의 점유권을 놓고, 로마의 비용으로 활발히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로마 동맹의 성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부로부터 폼페이와 [[루쿨루스]]의 눈부신 군사 작전과 남쪽으로부터는 [[파르티아]]의 침략의 결과로, 아르메니아는 로마-파르티야의 속국으로 양도되어, 기원전 65년 정복지의 중대한 부분을 잃었다. 같은 시기에, [[폰투스 왕국]]은 로마에게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영토는 콜키스를 포함하여 그녀의 속주로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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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의 전래 ==
[[파일:David III of Tao.jpg|thumb섬네일|200px|left|[[타오의 다비트 3세]], 바그라티드 가문의 조지아 왕자, 10세기]]
[[파일:Mirian III fresco.JPG|thumb섬네일|right|이베리아의 왕 [[이베리아의 미리안 3세|미리안 3세]]는 327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의 이베리아는 1세기 부터 [[미트라교]]와 [[조로아스터교]]의식이 거행되었다. 미트라교의 의식은 통합적인 성격과 뒤따르는 지역 의식들의 상호 보완, 특히 태양 숭배에 의해 다른 종교와 구별되었고, 점진적으로 고대 조지아인들의 믿음을 덧붙여 나갔다.<ref>GOCHA R. TSETSKHLADZE "Georgia" ''Encyclopedia Iranica'', Columbia University [http://www.iranica.com/newsite/articles/v10f5/v10f504c.html] {{웨이백|url=http://www.iranica.com/newsite/articles/v10f5/v10f504c.html |date=20071215184733 }} retrieved July 2, 2007</ref> 서조지아의 이베리아 왕국은 [[이베리아의 미리안 3세|미리안 3세]]왕이 [[기독교]]를 공식적인 왕국의 종교로 확립한 [[327년]]<ref>Theodor Dowling, ''Sketches of Georgian Church History'', New York, 1912, p 37</ref><ref>Charles Burney and David Marshal Lang, ''The Peoples of the Hills: Ancient Ararat and Caucasus'', p. 22</ref><ref>Allen, W.E.D.: ''A History of the Georgian People'', 1932, p. 64</ref> 에 개종하여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 중에 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된 연대는 317년,<ref>''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in Georgia'', Besiki Sisauri, p. 34</ref> 324년<ref>''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Ronald Grigor Suny, p. 20</ref> 등으로 나타낸 많은 기록들과 역사 문서들을 기반으로 수정된다. [[조지아 연대기]]에 따르면, [[카파도키아]]의 [[성녀 니노]]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재위 기간 중인 330년에 조지아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4세기 중반이었지만, 라지카(옛 이베리아 왕국)과 이베리아는 모두 기독교를 그들의 공식적인 종교로 채택하게 된다. 4세기와 대부분의 5세기 기간동안에, 이베리아(카르틀리 왕국으로도 알려짐)는 페르시아의 통제 하에 있게 됐다. 왕국은 폐지되었고 나라는 [[샤]](샤흐)에 의해 임명된 통치자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5세기말 이었기는 했지만, [[바흐탕 1세 고르가살리]] 왕자는 그 스스로 왕임을 선언하여 반-페르시아 반군을 편성했고 이베리아 왕국을 복원하였다. 그 다음에, 바흐탕의 군대들은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항하여 다양한 군사 작전들을 착수했다. 그러나 조지아 왕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그의 투쟁은 지속되는 성공을 이어가지 못하였다. 502년에 바흐탕이 죽고, 그의 아들 [[이베리아의 다치|다치]](502~514)의 짧은 통치 기간 이후에, 이베리아는 한때 페르시아의 속주로 재합병되었다. 그러나 그 때 이베리아 귀족들은, 조지아에서 ''에리스므타바리''로 불리는, 통치자들을 선출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7세기 후반에, [[중동]]을 차지하려던 비잔티움-페르시아 경쟁은 그 지역의 아랍 정복으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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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조지아 왕국}}
=== 조지아 왕국의 통일 ===
[[파일:Bagrat III of Georgia (Gelati mural).jpg|thumb섬네일|left|통일 조지아의 첫 번째 왕, [[바그라티오니 가|바그라티오니]] 왕실의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바그라트 3세]]]]
[[파일:Bediacup.jpg|thumb섬네일|250px|right|[[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의 베리아 컵, 999년]]
9세기의 첫 10년은 [[타오-클라르제티]]에서 새로운 조지아 왕국의 떠오름을 보았다. [[바그라티오니 가|바그라티오니]] 왕가의 [[아쇼트 1세 쿠로팔라테스|아쇼트 쿠로팔라테스]]는 [[아랍인|아랍]]으로부터 남이베리아의 옛 영토들을 해방시켰다. 그 영토들은, "이베리아의 쿠로팔라티나테"의 이름 아래 형식상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 였던 타오와 클라르제티, 그리고 [[샤브셰티]], 키카타, 삼트스케, [[트리알레티]], [[자바케티]]의 백작들의 공국들을 포함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지역은 [[아르타누지]]의 수도와 더불어 완전히 독립된 나라로 기능했다. [[쿠로팔라테스]]의 세습 칭호는 거의 한 세기동안 가문의 대표자들이 타오-클라르제티를 통치했던 바그라티오니 가문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쿠로팔라테 다비트 바그라티오니는 데오도시오폴리스(카린, 카르누칼라키)의 도시와 아르메니아 속주 [[바시아니]]의 병합에 의해, 그리고 한때 아랍 태수 [[카이시데]]에의 해 통제 되었던 아르메니아의 속주들인 카르퀴, 아파쿠니, 만트시케르트, 칼라트를 통틀어 보호 제도를 도입함으로 다비트는 그의 영토를 확장했다.
[[파일:Map Byzantine Empire 1045 2000px svg.png|thumb섬네일|250px|비잔티움 제국 시대의 조지아, 1045년]]
첫 번째 통일 조지아 군주국은 [[타오의 다비트 3세|쿠로팔라테 다비트]]가 카르틀리-이베리아의 백작령을 그의 왕국으로 가져오던 10세기 말에 형성되었다. 3년 후에, 그의 삼촌 [[맹인 데오도시우스]]가 죽고, 에그리시-압하지야의 왕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바그라트 3세]]는 압하지야의 왕좌를 승계했다. 1001년에 바그라트는 다비트가 죽은 결과로 타오-클라르제티(이베리아의 쿠로팔라티나테)를 그의 영토에 더했다. 1008~1010년에, 바그라트는 [[카케티]]와 헤레티를 합병했고, 그리하여 그는 조지아의 동부와 서부를 모두 통일한 첫 번째 단일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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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설자 다비트 4세와 조지아 국토회복운동 ===
[[파일:King David Aghmashenebeli.jpg|right|thumb섬네일|200px|건설자 다비트 왕, 쉬오-므그비메 수도원]]
조지아에서 셀주크 침입자들에 대항한 투쟁은 부친 게오르게 2세 바그라티오니가 퇴위하고 1089년 16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한 바그라티오니 왕가의 젊은 [[조지아의 다비트 4세|다비트 4세]]가 이끌었다. 왕위를 승계한 직후 곧바로 권력을 잡은 다비트는 정규군과 농민군을 만들었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에서 셀주크 투르크에 대항한 첫 번째 십자군(1096~1099)과 십자군의 공격은 조지아에서 다비트의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선호했다. 1099년 말에, 다비트는 셀주크에게 공물을 갖다 바치는 것을 그만 두게 되었고 [[트빌리시]]와 [[헤레티]]를 제외한 조지아의 영토 대부분을 해방시키게 되었다. 1103년에 그는 [[조지아 정교회]]를 재정립했고 조지아의 정부 총리(므트시노바르트 우쿠트세시)를 [[카톨리코스]](대주교)로 임명하여 왕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110~1118년 사이에 다비트는 로리, 삼슈빌르데, 루스타비, 그리고 저지대의 카르틀리와 타쉬리의 요새들을 차지했고, 그로인해 트빌리시는 셀주크의 고립 영토로 전환 되었다.
[[파일:KingDavidtheBuilderFlag.svg|thumb섬네일|150px|left|건설자 다비트의 통치 기간 동안의 조지아 국기]]
1118~1119년에, 터키 유목민들이 철수한 결과로 상당한 양의 무료에다가 정착이 안된 토지들이 많았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격의 인력들이 절박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다비트 왕은 [[북캅카스]]로 부터 4만명 정도의 [[킵착|킵차크]] 전사들을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조지아에 정착하게 하려고 초대했다. 1120년에 알라니아의 통치자는 스스로를 다비트의 봉신으로 인식했으며 그 후 수천명의 알란인(주장된 바에 의하면 현대 시대의 오세트인)들이 중심 캅카스의 경계를 가로질러 조지아의 내부로 보내졌다. 그들은 조지아의 카르틀리에 정착했다. 조지아의 왕실 군대는 독일,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서방에서 사는 모든 이들을 조지아에서는 "프랑크인"이라고 정의 되었었음}에서 뿐만 아니라 키예프 공국에서 보수를 목적으로 복무하러 온 사람들도 환영했다.
[[파일:Queentamar giorgi.jpg|300px|thumb섬네일|타마르 여왕과 그녀의 부친 [[조지아의 게오르게 3세|게오르게 3세]] 왕([[베타니아 수도원]]으로부터 복원된 벽화)]]
1121년, 셀주크 술탄 마흐무드는 조지아에 [[지하드]]를 발령하고 조지아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 그의 유명한 장군 중에 한명인 [[를리그하지]]와 휘하의 강력한 군대를 보냈다. 투르크의 군사들의 수가 분명히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지아는 [[디드고리 전투]]에서 침략자들을 훌륭히 무찔렀고, 1122년에는 그들은 트빌리시를 수도로 삼았다. 3년 후에 조지아는 쉬르반을 정복했고, 그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는 서부 쉬르반(한때 번영하고 있던 알바니아 왕국의 흔적)의 [[그히쉬-카발라]] 지역은 조지자에 의해서 합병되었다. 반면에 이미 이슬람교화 된 쉬르반의 나머지 지역은 조지아의 의존국이 되었다. 같은 해에 아르메니아의 광대한 부분이 다비트의 대군에 의해 해방되었고 뿐만 아니라 조지아의 손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124년에 다비트는 남아르메니아가 조지아 왕권의 영토로 편입한 아르메니아의 왕이되었다. 1125년에 다비트는 강력한 지역 권력의 지위를 가진 조지아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조지아에서, 다비트 왕은 아그마셰네벨리(건설자, {{llang|en|The Builder}})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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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왕 타마르 대제와 1184~1223년의 황금 시대 ===
[[파일:Tamar's fresco at Betania.jpg|thumb섬네일|upright|left|조지아의 타마르 여왕]]
타마르 여왕의 통치는 국가의 역사 전체에서 일지도 모르는 조지아의 절정을 상징한다. 1194~1204년에 타마르의 군대들은 남쪽과 남쪽에서 온 새로운 터키군의 침략을 눌러 부쉈다. 터키가 통제하던 남아르메니아 방면으로 다양한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카린]], [[에르지니안]] [[켈렛]], [[무슈]]와 [[반 (터키)|반]] 도시들을 포함하는 대부분의 남아르베니아 대부분을 조지아의 통제권 아래로 가져왔고, 남아르메니아가 조지아의 보호국이 됨으로, 터키의 현지 에미르와 술탄의 이름뿐인 통치아래 남겨졌다.
[[파일:Geor tamro aandersen.png|250px|thumb섬네일|조지아 왕국의 군사 지배 전성기, 1184~1225년]]
1204년에 십자군으로 인한 비잔티움 제국의 일시적인 몰락으로 조지아는 전체 동부 지중해 영역권에서 가장 강력한 기독교 왕국으로 남았다. 같은해 타마르 여왕은 아티나, [[리자]], [[트레비존드]], [[케라순트]], [[아미소스]], [[코티오라]], [[헤라클레아]]와 [[시노파]] 도시들이 있는 이전 비잔티움의 라조나와 파리아드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그녀의 군사들을 보냈다. 1024년에, 점유된 영토는 조지아에 의지하는 [[트레비존드의 제국]]으로 바뀌었다. 타마르의 친척인 [[트레비존드의 알렉시오스 1세|알렉시오스 콤네노스]] 왕자는 그 제국의 왕좌에 앉았다. 1210년에 조지아의 군대들은 남부 페르시아(현재 이란인의 아제르바이잔)에 침략했고 조지아의 보호 제도 하에 정복된 영토의 일부분으로 배치한, [[마란드]], [[타브리즈]], [[아르다빌]], [[쟈니안]]과 [[콰즈빈]] 도시들을 차지했다. 그러함은 그녀의 역사 전체에 걸쳐 조지아 최대의 영토 확장이었다. 타마르 여왕은 "압하지야, 카르트벨스, 란스, 카크스, 아르메니아, 쉬르반-샤키네, 샤키네-안의-샤크의 여왕이며, 동과 서의 주권자"로 호칭되었다. 조지아 역사가들은 종종 그녀를 "여왕 타마르 대제"로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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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년대에, 남캅카스와 [[소아시아]]는 [[몽골]]의 침략과 대면했다. 저지아-아르메니아 군사력과 그들의 동맹에 의한 격렬한 저항에도 물구하고,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중앙 아나톨리아 영토들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모든 지역은 마침내 몽골에 의해 함락되었다.
[[파일:KingLuarsab.jpg|thumb섬네일|200px|left|동조지아의 왕 루스랍 2세(나중에 참수됨)]]
1243년에, [[조지아의 루수단|루수단]] 여왕은 조지아가 그녀의 의존국을 상실하여 몽골에 수여되는 몽골과의 평화 협정을 체결했고, 동부 쉬르반, [[나키체반]]과 몇몇 다른 영토들을 마지못해 양도했으며, 몽골에 대한 공물의 진상뿐만 아니라 남아있던 영토의 이상에 그들의 점유와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 데-펙토인 통치에도 동의했다. 몽골에 의해 점유된 트빌리시는 왕국의 공식적인 수도로 잔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은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거절했고 1245년에 그녀가 죽기까지 [[쿠타이시]]에 머물렀다. 모든 고난 이상에다 더하여, 몽골로부터 자유롭게 남아있던 왕국의 부분까지도 해체되기 시작했다. 왕권은 그들이 인정한 몽골과의 관계를 확립하고 조지아에서 1266년에 실질적으로 양도한 [[삼트스케]]{조지아의 남부 속주들}의 여러 군사령관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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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와 합병(18세기) ==
[[파일:Eraclio_II_re_di_Georgia_ii.jpg|thumb섬네일|upright|카르틀리와 카케티의 에레클레 2세 왕]]
18세기 초반에 카르틀리는 새로운 법 체계를 제정하고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한 [[바흐탕 6세]]의 통치하에 부분적인 부흥을 보았다. 그의 통치 기간 중에 1709년에는 최초의 조지아어 인쇄 출판소의 설립을 보여줬다.<ref>Assatiani and Bendianachvili p.209</ref>
 
1762~1798년의 카르틀리-카케티의 왕 [[에리클레 2세]]는 오스만과 페르시아의 공격에 대항하여 러시아의 보호로 방향을 돌렸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예카테리나 여제]]는 터키에 대항하기 위해 조지아와의 동맹을 간절히 원했지만, 그들에게 빈약한 병력들만 파견했다.<ref>Suny pp.57-58</ref> 1769~1772년 토틀레벤 장군과 그 휘하의 잘 훈련된 러시아 군사들은 이메레티와 카르틀리-카케티에서 터키의 침입군들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 부대는 터키와의 충돌에 대비해서 철수했다. 1783년에 에레클레는 카르틀리-카케티가 러시아의 보호를 받음에 따라, 러시아와의 [[게오르기예프스키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1787년에 또 다른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는 그들의 병력들을 다른 그 지역에 사용하기 위해 에레클레의 왕국은 무방비 상태로 남겨두고 철수시켰다, 1795년, 페르시아의 샤 [[아그하 모함메드 칸]]이 나라를 침입했고 수도 트빌리시는 불태워져 공터가 되었다.<ref>Suny pp.58-59</ref>
[[파일:Solomon I of Imereti.jpg|thumb섬네일|upright|left|솔로몬 1세, 이메레티야의 왕]]
게오르계프스크 조약의 조항에 대한 러시아의 명예가 실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아 통치자들은 터키군과 싸웠던 러시아의 부대가 아무도 다른 어떤 곳으로 돌아갈데가 없다고 여겼다. 에레클레가 죽고, 카르틀리-카케티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내전이 발발하고 한명의 경쟁 후보는 분쟁을 중재하고 해결하려는 러시아에 의해서 지명되었다. 1801년 1월 8일에 트사르 [[러시아의 파울 1세]]는 조지아와 카르틀리-카케티가 러시아 제국으로 편입하는 법령에 서명했고,<ref>Gvosdev (2000), p. 85</ref><ref>Avalov (1906), p. 186</ref> 1801년 9월 12일에 트사르 [[러시아의 알렉산트르 1세|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 비준되었다.<ref>Gvosdev (2000), p. 86</ref><ref>Lang (1957), p. 249</ref>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조지아 출신 외교관 [[가르세반 찹차바드제]]는 러시아의 차관 [[알렉산데르 쿠라킨]]이 남겨둔 항의 메모에 반발했다.<ref>Lang (1957), p. 251</ref> 1801년 5월에 러시아 장군 카를 헤인리치 크놀링은 다비트 [[바토니시빌리]]를 태자에서 퇴위시켰고, 이반 트로비치 라사레프 장군의 명령에 의해 정부가 파괴되었다.<ref>Lang (1957), p. 24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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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통치 ==
''{{본문|러시아 제국 지배 하의 조지아}}''
[[파일:Chavchavadze bagrationi georgians.jpg|thumb섬네일|조지아의 라콥 [[찹차바제]] 왕자와 [[바그라티오니 가|바그라티오니-무크라넬리]] 왕자]]
러시아와 조지아는 공통점이 많았다. 주 종교가 정교회 기독교이며, 두 나라 다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이 농노의 인구들을 통치하고 있었다. 러시아 당국은 그들의 제국의 나머지 지역에 조지아를 통합시키려는데 목적이 있었지만, 처음에 러시아의 통치는 독단적이고, 변덕이 심했으며 지역 법과 관습에 무관심 했으므로, 1832년에 조지아의 귀족들이 음모를 꾸미게 했고, 1841년에는 소작농들과 귀족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게 만들었다.<ref>Suny pp. 70-73</ref> 그 사건들은 1845년 [[미하일 보론초프]]를 [[카프카스 총독]]으로 임명하는 변화를 안겨줬다. 보론초프 백작의 새 정책들은 그가 점점 더 유럽화 되는 귀족들 보다 성공적으로 우세하게 했다. 조지아 농노들의 생활은 매우 달라졌다. 그러나, 시골 경제는 심각하게 침체되어 있었다. 조지아의 농노들은 무시무시한 가난에 허덕이며 살았고 아사에 대한 빈번한 위협을 받았다. 그들 중 몇몇은 도심으로 가서 작은 노점상이나 노역을 하며 살았는데, 그 마을은 중세 시대에 조지아로 이주해 왔던 조상들을 두고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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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아 국가 운동의 성장 ==
[[파일:Ilia_Chavchavadze_by_Alexander_Roinashvili.jpg|thumb섬네일|200px|right|[[릴라 찹차바제]] 왕자, 1860년대에 조지아 국가 부흥 운동의 지도자]]
농노의 해방은 농노들이나 귀족들에게도 모두 만족스럽지 못했다. 농노의 가난은 완화되지 않았고 귀족들은 얼마간의 그들을 잃어갔다. 특정 귀족들은 [[자본주의]]화가 된 지역에서 번영하는 조지아의 아르메니아인 중산층과 같은 도시의 성장하는 세력에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차르 독재]]와 아르메니아인의 경제적 우세에 대한 조지아인들의 불만<ref>Stephen Jones, Socialism in Georgian Colors: The European Road to Social Democracy 1883-1917, p 8</ref> 은 19세기 후반기에 국가 해방 운동의 발달을 이끌었다.
 
1905년에는 대규모의 소작농 반란이 일어났고, 그 반란은 당분간 긴장을 완화시키는 정치 개혁을 이끌었다. 그 기간 동안에는 마르크스주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조지아에서 지배적인 정치 활동을 하게 됐고, 1905년 이후에 수립된 러시아의 [[두마|두마 의회]]에서 모든 조지아 의원들이 선출되었다. 조지아인 [[볼셰비키]] 조세프 비싸료노비치 드주가시빌리([[조셉 스탈린]]으로 더 유명하게 알려짐)는 조지아에서 혁명(반 [[멘셰비키]])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다음에 더 나아가 소비에트 연방을 통제하게 됐다.<ref>Dowling, ''Sketches from Georgian Church History'', London 1912</ref>
[[파일:Tschawtschawadse - Zereteli Monument Tbilissi.jpg|thumb섬네일|upright|[[트빌리시]]의 기념 동상. 릴라 찹차바제 (왼쪽) & 아카키 체레텔리 (오른쪽)]]
 
많은 조지아인들이 조지아 정교회 독립 상실에 대해 당황했다. 러시아인 성직자들이 조지아의 교회들과 수도원들을 통제하게 됐고, 모든 조지아 전역에 걸쳐 조지아어 전례 사용을 금지 했으며 다양한 교회들의 중세 조지아의 프레스코화들을 훼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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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에트 연방 소속(1921~1990년) ==
[[파일:Georgian soviet republic1922.png|thumb섬네일|250px|right]]
[[파일:Georgian soviet republic1957 1991.png|thumb섬네일|250px|right]]
[[1992년의 조지아 문제|조지아 사건]] 기간 동안에, 조지아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조지아([[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를 포함)로 구성된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강제적으로 합병되었다. 소비에트 당국은 조지아가 몇몇 지역을 [[터키]]([[타오-클라르제티]] 주와 [[바투미]]주의 일부), [[아제르바이잔]]([[헤레티]]/[[사인길로]] 주), [[아르메니아]]([[로레 주|로레]] 지역)과 러시아(동조지아)의 [[케비]] 북동부 끝)에게 양도할 것을 강요했다. 소비에트의 지배는 가혹했다. 1921~1924년에는 약 5만명의 사람들이 처형당하거나 살해됐으며, 1935~1938년과 1942년, 1945~1951년에는 15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스탈린과 그의 비밀 경찰 두목 [[라브렌티 베리아]] 하에서 추방되었다. 1936년에, TFSSR은 해산했고 조지아는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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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아의 후기-공산주의자들(1990~2003년) ==
[[파일:Zviad_Gamsakhurdia_and_Merab_Kostava,_Tbilisi,_1988.jpg|250px|thumb섬네일|1980년대 후반의 조지아 독립 운동의 지도자들, 즈뱌드 감사후르디아(왼쪽)과 메랍 코스타바(오른쪽)]]
 
[[파일:April9victims.jpg|250px|thumb섬네일|right|시청 게시판에 붙은 1989년 4월 9일 대학살의 희생자들(대부분이 젊은 여성)의 사진들]]
공산주의 정부에 대한 반대파의 압력은 1990년 10월 28일 개최된 여러 당들과 민주주의 의회가 공개된 궁긍적인 결과인 대중 시위와 충돌로 명백해 졌다. 그들은 [[조지아 공화국 최고간부회의]]에 의장이 된 반체제 인사 지도자 [[즈뱌드 감사후르디아]]가 주도하는 "원탁회의"의 합동에 의해 당선되었다. 감사후르디아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1991년 3월 31일에 [[1991년 조지아 독립 국민 투표|독립 국민 투표]]를 실시했고, 98.9%의 득표율로 공인되었다. 그리하여 1991년 4월 9일에 소비에트 연방에서 부터 독립이 선언되었고,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조지아의 독립은 미국과 유럽의 나라들과 같은 해외 강대국들에게 널리 인식되었다. 감사후르디아 정부는 공화국에 주둔하는 소비에트 군사 기지들과 같은 러시아 지배의 어떠한 흔적이라도 강력하게 반대했고,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에) 그의 정부는 [[독립 국가 연합]](CIS)에 가입하는 것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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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9월 24일의 압하스 재앙의 경야 때에, 즈뱌드 감사후르디아가 정부에 대항한 봉기를 조직하기 위해 추방된 곳에서 돌아왔다. 그의 지지자들은 정부 군대의 혼란을 자본화 할 수 있었고 서조지아의 많은 곳으로 급속히 퍼졌다. 그런 상황들은 러시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에 경종을 울렸고, 러시아군의 부대들은 정부를 돕기위해 조지아로 파병 되었다. 감사후르디아의 반란은 신속히 붕괴되었고 그는 1993년 12월 31일에 죽었는데, 그 때는 아무래도 그의 적들에 의해 궁지에 몰리게 된 다음 같다. 대단이 논란이 많은 협정에서, 셰바르드나제 정부는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비용의 지원국의 일부로 CIS 가입을 승인해야 했다.
 
[[파일:Georgia cities01.png|thumb섬네일|250px|left]]
셰바르드나제는 1995년 8월에 폭탄 공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는데, 그는 그 소행을 그의 옛날 준군사 동맹들의 소행으로 여겼다. 그는 준군사주의 지도자 [[자바 로셀리아니]]를 투옥할 기회를 잡았고 "마피아 세력"의 소탕 전쟁이 선포될 때 그 작전에 그의 [[므크헤드리오니]] 의용군 도입을 금지했다. 그러나, 그의 정부, 그리고 그와 가까운 가족들은, 점점 더 조지아의 경제 발전에 방해가 되는 침투성의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갔다. 그는 1995년 11월과 2000년 4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대다수의 크나큰 지지로 당선되었지만, 선거 조작에 의혹에 대한 집요한 탄원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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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바르드나제 이후의 조지아 ==
[[파일:2OP 30.JPG|thumb섬네일|[[장미 혁명]]: 시청 앞의 시위대, [[트빌리시 자유 광장]] ]]
[[미헤일 사카시빌리]], [[니노 부르드자나제]]와 [[주랍 즈바니아]]가 이끄는 민주주의자의 강력한 제휴는 셰바르드나제의 정부의 2004년 11월 2일의 위회 선거에 반대하여 연합되었다. 그 선거는 뻔뻔스럽게 조작된 것으로 널리 간주되었다. 그에 대한 반향으로, 반대파들은 트빌리시 대로에서 대규모의 반대 시위대를 조직했다. 팽팽한 긴장 상태로 2주일이 지나고, 셰바르드나제는 2003년 11월 23일에 사임하였고 부르드자나제에 의해 임시 원칙의 대통령으로 교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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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대통령은 정부에 나타난 많은 난관들과 직면했다. 23만명이 넘는 [[국내실향민]]들이 막대한 경제적 부담감에 시달렸다. 분리주의자들의 지역인 [[압하스]]와 [[남오세티야]]의 평화는 러시아와 [[유엔]]에 평화유지군과 국가간 기관들에 의해서 감독되었고 상황은 위태위태했다. 수년의 경제 발전과 협상은 지역간 적대감정의 극복이 요구됐다. 상당한 경과는 남오세티야-조지아 충돌에 대한 협상에서 다뤄졌고 협상들은 조지아-압하스 충돌에 대한 협상으로 계속되고 있다.
[[파일:Saakashvili n bush.jpg|thumb섬네일|미헤일 사카시빌리(오른쪽)과 [[조지 W. 부시]]]]
장미 혁명 이후에, 조지아 정부와 준-분리주의 아자리아 지도자 [[아슬란 아바쉬제]] 간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아바쉬제는 트빌리시 당국이 공문서로 [[아드자라에]] 보낸 사카시빌리의 요구를 거절했다. 양측 모두 군대를 동원했고 전쟁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사카시빌리의 최종 제안과 대규모의 거리 시위대는 아바쉬제가 사임하고 조지아를 떠날 것을 강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