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요세푸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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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osephusbust.jpg|thumb섬네일|150px|요세푸스의 것이라 전해지는 로마 시대의 흉상.<ref>Plagnieux, P. 'Les sculptures Romanes' Dossiers d'Archéologie (January 2001) pg 15</ref>]]
'''플라비우스 요세푸스'''({{llang|la|Flavius Josephus|플라위우스 요세푸스}}, {{llang|grc|Φλάβιος Ιώσηπος|플라비오스 이오세포스}}, [[37년|기원후 37년]] 경 ~ [[100년]] 경)는 [[1세기]] 제정(帝政) 로마 시대의 [[유대인]] 출신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이다. [[66년|기원후 66년]]에 발발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유다이아 전쟁]]에서 유대군을 지휘하여 로마군에 맞섰으나, 로마군의 포로가 된 뒤 투항하여 정보를 제공해 주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배려로 풀려나 로마 시민이 되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라는 이름은 새로 로마 시민이 된 이들에게 적용되는 관례에 따라 보호자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가문을 이름을 따 '플라비우스'를 가문이름(nomen)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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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령(領) 속주였던 유다이아 지구의 주도(州都) 예루살렘에서 제사장의 집안에 태어났으며, 그 자신은 청년 시절에는 [[사두가이파]]나 엣세네파 같은 유대교의 여러 파를 거쳐 최종적으로 [[바리사이파]]를 선택했다고 한다. 펠릭스 장관 시절이던 [[64년|기원후 64년]]에는 반(反)로마 폭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로마로 끌려온 유태인들에 대한 석방을 황제에게 탄원하기 위한 진정사절단의 일원으로서 로마를 방문했고(당시 그 사절단의 최연소 단원이었다) 같은 유대인 배우의 소개로 만난 [[네로 황제]]의 황후 포파이아 사비나를 만나기도 했다.
 
[[파일:Ancient Galilee.jpg|thumb섬네일|250px|유대 전쟁 당시 요세푸스가 지키고 있었던 갈릴리 지역.]]
그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파견되어 갈릴리의 마을인 요타파타를 지키는 지휘관으로서 로마군에 맞섰으나,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베스파시아누스 플라비우스]]·[[티투스]] 부자가 지휘하는 로마군에게 패하고 만다. 이때 이방인에 대한 투항보다 차라리 자결하는 쪽을 택한 다른 유대인 지휘관들은 제비를 뽑아 서로 죽였지만, 마지막으로 요세푸스와 다른 병사 한 명이 남겨졌을 때 요세푸스는 그 병사를 설득해 함께 로마군에 투항하였다. [[67년|기원후 67년]] 7월의 일이었다. 전쟁 포로가 된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앞에서 그가 훗날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ref>타키투스의 《역사》에도 기술되어 있는 이 요세푸스의 예언을 베스파시아누스는 믿을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유대 전쟁사》中). 하지만 요세푸스가 네로의 다음 황제가 베스파시아누스가 될 거라고 예언했던(하지만 네로가 자살할 것이라고는 하지 않은) 기원후 67년 당시, 네로 황제는 30세의 젊은 나이였고(요세푸스와 같은 나이) 베스파시아누스는 58세(그 아들 티투스가 28세)였는데, 네로의 자살이라는 변수가 아니었다면 나이상 베스파시아누스가 먼저 죽게 될 것이고 정말 황제가 된다고 해도 네로의 나이로 보아서는 아주 먼 훗날의 일이 된다. 또한 이러한 예언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요세푸스 자신이 네로 황제가 있는 로마로 압송되어 죽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점을 들어 이 예언 자체를 요세푸스의 도박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권8, '위기와 극복' p.221~222) </ref> 목숨을 건졌다.<ref>요세푸스의 예언을 믿어서라기보다는 단지 요세푸스의 출신 계급이나 지혜를 유대 반란 진압에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권8, '위기와 극복' p.223) 이로부터 1년 뒤에 네로 황제가 갑자기 죽고 다음 황제로 갈바가 즉위하면서, 또 갈바가 오토에게 살해되고 오토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요세푸스의 예언은 두 번이나 빗나가게 되지만 그럼에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요세푸스의 예언이 틀렸다며 책망하거나 처벌하지 않았다고 한다.</ref> 네로 황제 사후의 혼란을 거쳐 실제로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된 뒤, [[69년]] 풀려난 요세푸스는 그의 아들 티투스의 막료로서 중용되었고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70년|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포위 당시 유대 군과의 협상에 참여한 듯하다. 이후 그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순간을 모두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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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파일:Josephus.jpg|250px|thumb섬네일|right|윌리엄 휘스턴에 의해 번역된 그의 저서에 실린 요세푸스의 초상화. 낭만주의 시대의 판화이다.]]
역사학자 E.메리 스몰우드(E. Mary Smallwood)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용문|(요세푸스는) 그 자신이 가진 학식뿐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던 갈릴리인과 로마인 양쪽 모두의 지휘관으로서의 견해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는 요타파타에서 그의 동지들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살아남았던 자신의 충격적인 이중성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 자신이 얼마나 신랄하게 그의 '앞잡이'로서의 행동을 스스로 털어놓았는지를 깨닫기에는 너무 순진했고, 그가 그의 반대자들에게 더럽혀진 것이 지나치게 혹독했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의 아니게 로마군에 가담한 뒤의 그는 자신이 가진 '포로'라는 강점에 의지했고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그의 여생에 효과적이었다.<ref>"(Josephus) was conceited, not only about his own learning but also about the opinions held of him as commander both by the Galileans and by the Romans; he was guilty of shocking duplicity at Jotapata, saving himself by sacrifice of his companions; he was too naive to see how he stood condemned out of his own mouth for his conduct, and yet no words were too harsh when he was blackening his opponents; and after landing, however involuntarily, in the Roman camp, he turned his captivity to his own advantage, and benefitted for the rest of his days from his change of side." Josephus, Flavius: The Jewish War. Translatyed by G. A. Williamson, introduction by E. Mary Smallwood. New York, Penguin, 1981, p.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