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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정문부는 적을 가파(加坡)에서 만나 장차 싸우려고 모든 장수에게 부서(部署)를 정해 주었다. 정현룡은 중위장을 시켜 백탑(白塔)에 주둔하게 하고, 오응태와 원충서(元忠恕)는 복병장을 시켜 석성(石城)과 모회(毛會)에 나누어 주둔케 하고, 한인제(韓仁濟)는 좌위장을 시켜 목책에 주둔케 하고, 유경천(柳擎天)은 우위장을 시켜 날하(河)에 주둔케 하고, 김국신ㆍ허진은 좌우 척후장을 시켜 임명(臨溟)과 방치(方峙)에 나누어 주둔케 하였다. 『북관대첩비』는 "적이 승리에 익숙하여 심각하게 방비도 하지 않았으므로 기습하여 쳐부쉈다."고 이때의 싸움을 전하고 있으며,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응원해 와서 마침내 7천여 명의 군사가 모였다고 한다. 또한 성진(城津)에 있는 적이 임명에 와서 크게 노략질하자 경기병을 이끌고 습격했고, 비산(萆山)에 복병을 두어 적이 돌아오는 것을 살펴서 협공하여 쳐부수었으며, 이때 전사한 왜병 수백의 시신을 배를 갈라서 창자를 큰 길에 펼쳐 놓았다고 한다. 12월에는 길주의 쌍포진(雙浦津)에서, 이듬해 정월에 다시 단천에서 싸워 모두 이겼다. 정문부는 돌아가는 왜병을 추격해 백탑 남쪽 옻나무 밑까지 갔으나, 이붕수와 허대성ㆍ이희당(李希唐) 등이 전사하기도 했다. 이로써 왜병들은 관북(함경도)에는 발을 붙이지 못했고, 정문부 장군 명성만 들어도 도망했다고 한다.
 
[[파일:북관대첩비.jpg|thumb섬네일|[[북관대첩비]]]]
선조는 죽은 이붕수에게 감찰을 증직하고, 승첩을 알리러 온 최배천에게는 조산(朝散)의 가자(加資)와 명주 한 필의 상을 주었으며, 정문부를 길주목사로 임명하였다. 이것을 [[북관대첩]]이라고 하는데, [[1593년]] [[음력 1월 1일]] 의병장 신분으로 활약한 정문부를 순찰사 윤탁연이 조정에 정문부의 공을 반대로 고했기 때문에 크게 포상받지 못했고, 영흥부사에 제수된다. 윤탁연은 조정에서 실사를 보낸 사신에게도 뇌물을 주어 진상 조사를 무마시켰다.<ref>{{웹 인용
|url =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nb_12601001_006&grp=&aid=&sid=485462&pos=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