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너스 아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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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2 = [[더글러스 맥아더]]<br />[[조지 S. 패튼]]
|군대1 = <br /><div style="text-align: center;">보너스 아미</div>
|군대2 = [[파일:US flag 48 stars.svg|center가운데|80px]]<div style="text-align: center;">[[미육군]]</div>
|병력1 = 퇴역군인 17,000명<br />그 가족 친지 26,000명
|병력2 = 보병 500명<br />기병 500명<br />[[르노 FT]] 전차 6대<br />경찰 8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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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1781년,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의 대부분은 보수를 받지 못하고 제대하였다. 2년 후, 백여명의 펜실베니아펜실베이니아 전쟁 참전 용사들은 필라델피아로부터 워싱턴 D.C.까지 행진하여 의회가 개회 중이던 [[백악관]]을 둘러싸고 자신들의 보수를 요구했다. 그리하여 개회 중이던 의원들은 [[뉴저지]]의 [[프린스턴]]으로 피신을 하였고 몇 주 후, 정부는 그때 당시 시위 중 이였던 참전용사들을 모두 제명시켰다.<ref>U.S. Constitution, Article One of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Section 8: Powers of Congress|Article I. Section 8. Clause 17)</ref>
 
1776년부터 전쟁 참전용사들에게 그들이 군인으로서 받은 보수와 그들이 입대하지 않았다면 벌여 들였을 돈의 차이를 매겨 보상 (보너스)를 주는 제도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스페인-미국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은 이러한 보상을 전혀 받지 못하였고, 결국 1차 [[세계대전]] 이후 이들에겐 오직 60달러의 보상만 주어졌고, 이들에 대한 보상 미지급은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그리고 1919년에 설립된 미국 재향 군인회는 정부에게 추가적인 보상을 외치며 정치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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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3,662,374장,약 36.38억달러 값어치에 달하는 병역인증서가 참전용사들에게 발급되었다. 의회는 국회는 펀드를 설립하고 1억1천2백만달러를 적금하고 그에 따른 20년간의 이자를 더하여 1945년 참전용사들에게 36,38억달러를 지불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와 동시에 참전용사들은 이 펀드에서 병역인증서가 상당하는액면가의 22.5%까지 돈을 대출받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1년 [[경제대공황]]에 의해 의회는 병역인증서로 대출가능한 최대치를 50%로 인상시켰다. 곧바로 병역인증서에 대한 상환을 진행하였지만 후버 대통령과 공화당의원들은 이러한 행동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즉, 그들은 정부가 지불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선 세금을 늘려야 할 것이고, 이것은 잠재적으로 경제회복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외국 전쟁에 참전했던 참전용사들은 계속해서 연방정부에 병역인증서의 보다 빠른 현금상환을 요구했다.
 
1932년 1월, 콕스라고 이름 붙여진 부대 소속 25000명의 실업자 펜실베니아펜실베이니아 사람들은 수도 워싱턴 D.C. 에서 가장 큰 시위를 벌였는데, 이것이 후에 실업자들이 마치에 합류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 마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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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의 개입 ==
오후 4시 45분, 당시 육군 소령이던 [[조지 스미스 패튼]] 관할의 [[탱크]] 6대를 지원 받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제 12 보병연대와 제 3 기병연대는 [[펜실베니아펜실베이니아]] 대로에 집결하였고, 수천명의 공무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길가에 선 채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켜 보고 있던 보너스 아미는 군대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 행진하는 것이라 믿고 그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패튼 소령은 기병대에게 보너스 아미들을 향해 돌격할 것을 명령하였고,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Shame! Shame!” 이라 외쳤다.
 
기병대의 돌격 이후에 총검과 [[최루탄]]으로 무장한 보병대가 막사로 진입해 참전 용사들의 가족들과 막사에 있던 지지자들을 몰아냈다. 참전 용사들은 아나코스티카 강을 건너 자신들의 가장 큰 막사로 도망을 갔고 후버 대통령은 공격을 멈추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참전 병사들의 행진을 미국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의도로 간주하고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하고 새로운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에 55명의 참전 용사들이 부상을 입었고 135명이 체포 당했다. <ref name=timebattle />이로 인해 한 참전용사의 부인 한 명은 아이를 [[유산]]하였다. 최루탄 공격을 당한 후 12주된 버나드 마이어스가 병원에서 사망하자 정부 수사기관은 아이가 장염에 의해 사망했다고 거짓 발표를 하였으나, 병원 측 대변인은 최루탄이 아이의 목숨에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다. 이 군사작전도중에 당시 맥아더 장군의 부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소령은 군의 최고통수권자가 미국의 참전 병사들을 상대로 그런 작전을 직접 수행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다. 아이젠하워 소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그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멍청한 자식한테 그곳에 가지 말라고 했지.” “그곳은 참모총장이 있을만한 곳이 되지 못했어.”<ref name=Wukovits43>{{서적 인용|title=Eisenhower |last=Wukovits |first=John F. |year=2006 |publisher=Palgrave Macmillan |location=New York |isbn=0-230-61394-2 |page=43 |url=http://books.google.com/books?id=om5ZykQFGrwC&pg=PA43#v=onepage&q&f=false |accessdate=15 June 2011 }}</ref> 그런 그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훗날 맥아더의 행동을 배서해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ref>{{서적 인용|title=Eisenhower: A Soldier's Life |authorlink=Carlo D'Este |year=2002 |publisher=Henry Holt & Co. |location=New York |isbn=0-8050-5687-4 |page=223 |url=http://books.google.com/books?id=RCeteK7LEiYC&pg=PA223#v=onepage&q&f=false |accessdate=15 June 2011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