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헤이우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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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렌스 섬유 파업 ===
[[파일:11-haywood-bohn.jpg|섬네일|오른쪽|250px|헤이우드는 산별노조 원리에 대한 대중적 소개서를 1911년 [[찰스 H. 커 출판회사]]를 통해 발행했다.]]
빌 헤이우드가 WFM을 떠나 IWW를 조직하고 있을 때쯤 [[매사추세츠 주매사추세츠주]] [[로렌스 (매사추세츠주)|로렌스 시]]에서 그 유명한 [[로렌스 섬유 파업]]이 터져 국가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 1912년 1월 11일, 로렌스 시의 방직공장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에 항의하여 일손을 놓았다. 1주일 만에 2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IWW는 이미 로렌스 현지에서 활동하며 파업 지도부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관계자들은 경찰을 부르는 것으로 응답했고, 파업은 급격히 폭력사태로 치달았다. 현지의 IWW 지도자 [[조지프 제임스 에토르|조지프 에토르]]와 [[아르투로 지오바니티]]가 파업에 참여한 여공 [[안나 로피조]]에 대한 모살 혐의로 구금되었다.<ref>Fred W. Thompson, ''The IWW: Its First Seventy Years 1905–1975.''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1976; pg. 56.</ref> 그러나 그녀가 경찰 발포에 의해 사망했음을<ref>Carlson, ''Roughneck,'' pg. 166.</ref> 확인한 목격자가 열아홉 명이나 있었다.<ref>Haywood, ''The Autobiography of Big Bill Haywood,'' pg. 249.</ref>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헤이우드를 비롯한 조직가들이 로렌스로 내려가서 파업을 맡기로 했다. 이후 수 주에 걸쳐 헤이우드는 파업의 여러 전술적 결정사항들을 지휘 또는 승인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전술은 파업 노동자들의 굶주린 아이들을 뉴욕과 버몬트로 보내서 동정을 유발하자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