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중 (168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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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숙종 37년) 생원이 되고, [[음서 제도|음서]]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通德郞) 재직 중 [[1727년]](영조 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 21등으로 급제하였다.
 
승정원가주서, 승정원사변가주서를 거쳐 사헌부감찰, 병조정랑을 거쳐 용강현령으로 나갔다. 1739년 어느 관료의 방해로 임용되지 못하다가 그해 [[8월]] 병조정랑에 재기용되고 [[비변사]]낭청직을 겸직했다. 이후 [[종묘서]]령으로 재직 중 아들 [[신후담]]이 정리한 온릉지 2권을 [[영조]]에게 올렸다. 병조정랑병조좌랑 겸 춘추관기주관에 이르렀으며 사후 증 예조참판 겸 동지, 홍문관제학에 추증되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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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사헌부]][[감찰]], [[병조]][[정랑]]을 거쳐 [[용강]][[현령]]으로 나갔다. 용강현령 재직 중, 조정 고위 관직의 서자가 행패를 부려 아무도 제지못하는 것을 엄벌에 처하였다. 이후 그 고위직의 미움을 사서, 신상에 해로울 것을 예상하고 [[1733년]] 스스로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739년]] [[단경왕후]] 복위과정에서 영조가 친히 [[단경왕후]]능에 거동 후 그를 불러서 특별히 대접하고 그를 기용하고자 하였으나, 중간에 그 고관으로 부터 공을 혹평하고 이를 막아 기용되지 못하였다. 그해 [[8월]] [[병조]][[정랑]]에 제수되고 [[비변사]]낭청을 겸임하였다. [[1742년]](영조 18년) [[종묘서]]령(宗廟署令)에 제수되고 그해 [[6월]] 아들 [[신후담]]이 정리한 온릉지 2권을 영조에게 올렸다. 병조정랑병조좌랑 겸 춘추관 기주관에 이르렀다.
 
[[1789년]](정조 14년) [[증직|증]] 가선대부 [[예조]][[참판]](贈 嘉善大夫 禮曹參判)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同知經筵義禁府事 弘文館提學 同知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 副摠管)으로 [[추증]]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