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중 (168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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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7년]](영조 3년) [[8월]] 승정원가주서가 되었다. 그해 11월 병이 있는 가주서 권집 대신 다시 승정원가주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좌승지 채성윤(蔡成胤)의 건의로 군직을 겸직하였다. 11월 12일에 사직했다가 그해 12월 다시 사변가주서로 임명되고 좌부승지 이중관(李重觀)의 건의로 군직을 겸하였다. 같은 달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는 좌의정 조태억(趙泰億)의 집에 파견되어 명소패를 전달하고 돌아왔으며, 그달 말 의금부에 연행되어 추고를 받기도 했다.
 
이후 [[사헌부]][[감찰]], [[병조]][[정랑]]을 거쳐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나갔다. 용강현령 재직 중, 조정 고위 관직의 서자가 행패를 부려 아무도 제지못하는 것을 엄벌에 처하였다. 이후 그 고위직의 미움을 사서, 신상에 해로울 것을 예상하고 [[1733년]] 스스로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739년]] [[단경왕후]] 복위과정에서 영조가 친히 [[단경왕후]]능에 거동 후 그를 불러서 특별히 대접하고 그를 기용하고자 하였으나, 중간에 그 고관으로 부터 공을 혹평하고 이를 막아 기용되지 못하였다. 그해 [[8월]] [[병조]][[정랑]]에 제수되고 [[비변사]]낭청을 겸임하였다. [[1742년]](영조이후 18년) [[종묘서]]령온릉(宗廟署令溫陵)에 제수되고 그해 [[6월]] 아들 [[신후담]]이 정리한 온릉지 2권을 영조에게 올렸다. 병조좌랑 겸 춘추관 기주관에보수를 이르렀다맡겼다.
 
[[1742년]](영조 18년) [[종묘서]]령(宗廟署令)에 제수되고 그해 [[6월]] 아들 [[신후담]]이 정리한 온릉지 2권을 영조에게 올렸다. 병조좌랑 겸 춘추관 기주관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 영조|영조]]가 명하기를 '신귀중을 청현직(淸顯職)의 명단에 통망(通望)하라' 하였으나, [[이조]]전랑들이 매번 자신은 그의 얼굴을 모른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누군가 그에게 뜻을 굽혀 그들에게 아부할 것을 권하였으나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후에 임금이 전교하며 한탄하기를 '내가 신귀중 한 사람 쓰고자 하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이런 상태에서 인재를 얻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1789년]](정조 14년) [[증직|증]] 가선대부 [[예조]][[참판]](贈 嘉善大夫 禮曹參判)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同知經筵義禁府事 弘文館提學 同知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 副摠管)으로 [[추증]] 되었다.
 
묘갈문은 아들 [[신후담]]의 스승인 [[이익 (1681년)|성호 이익]]이 지었다. [[1789년]](정조 14년) [[증직|증]] 가선대부 [[예조]][[참판]](贈 嘉善大夫 禮曹參判)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同知經筵義禁府事 弘文館提學 同知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 副摠管)으로 [[추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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