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중 (1682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이후 [[사헌부]][[감찰]], [[병조]][[정랑]]을 거쳐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나갔다. 용강현령 재직 중, 조정 고위 관료의 서자가 행패를 부려 아무도 제지못하는 것을 엄벌에 처하였다. 이후 그 고위직의 미움을 사서, 신상에 해로울 것을 예상하고 [[1733년]] 스스로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739년]] [[단경왕후]] 복위 과정에서 영조가 [[단경왕후]]의 일족이 억울하게 죽은 사연을 물어본 뒤, 임금이 친히 [[단경왕후]]능에 거동 후 그를 불러서 특별히 대접하고 그를 기용하고자 하였으나, 중간에 그 정승이 그를 혹평하고 이를 막아 기용되지 못하였다. 이후 온릉(溫陵) 보수를 맡겼다. 창덕궁(昌德宮) 선정전(宣政殿)에서 영조를 알현하고서알현하고 중종의 비(妃)인정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가 임종하였을 때 후사(後事)가 없으니 단경왕후의 셋째친정조카 생질인중 한 명인 신사원(愼思遠)이 처음에는 제사를 받들었으나 신사원에게도 아들이 없어 심수겸(沈修謙)이 제사를 받들었고, 심수겸에게도 아들이 없어 심수겸의 사위인사위(李) 아무개가 제사를 받들었으나받들다가 집이 가난하여 제사를 제대로 받들지 못하고 신위(神位)만 모시고 있던있다가, 것을자신의 저의 조부인조부 신희가 신위를 모셔와 제사를 지냈으며,지냈고 종가집에 후사가 없어 자신의 부친 신휘오가 제사를 모셨다고 고하였다. 그해 [[8월]] [[병조]][[정랑]]에 제수되고 [[비변사]]낭청을 겸임하였다.
 
[[1742년]](영조 18년) [[종묘서]]령(宗廟署令)에 제수되고 그해 [[6월]] 아들 [[신후담]]이 정리한 온릉지 2권을 영조에게 올렸다. 병조좌랑 겸 춘추관 기주관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 영조|영조]]가 명하기를 '신귀중을 청현직(淸顯職)의 명단에 통망(通望)하라' 하였으나, [[이조]]전랑들이 매번 자신은 그의 얼굴을 모른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누군가 그에게 뜻을 굽혀 그들에게 아부할 것을 권하였으나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후에 임금이 전교하며 한탄하기를 '내가 신귀중 한 사람 쓰고자 하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이런 상태에서 인재를 얻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