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즈키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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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 정화 ==
전왕 [[아하스]]의 아들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옳은 일들을 하였다. 히스기야는 맨 먼저 성전의 문들을 열고 보수하였으며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모아 성전을 정화하도록 명령하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레위인들이 나서 크핫의 자손 아마시이의 아들 마핫과 아자르야의 아들 요엘, 므라리의 자손 압디의 아들 키스와 여할렐엘의 아들 아자르야, 게르손인들 중에서는 짐마의 아들 요아와 요아의 아들 에덴, 엘리차판의 자손에서는 시므이와 여이엘, 아삽의 자손에서는 즈카르야와 마탄나, 헤만의 자손에서는 여히엘과 시므이, 여두툰의 자손에서는 스마야와 우찌엘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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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모인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며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내며 [[하나님]]을 찬양했고 히스기야는 능숙한 솜씨로 레위인들을 격려해 주고 친교 제물을 바치고 축제 제물들을 나눠 먹었다. 또한 히스기야는 회중에게 황소 1000마리와 양 7000마리를 내놓고 대신들 역시 황소 1000마리와 양 1만 마리를 회중에게 내놓았다.
 
이렇듯 다윗의 아들 솔로몬 시대 이후 예루살렘에서 이 같은 큰 파스카 축제를 지낸 일이 없었다.
 
== 종교 개혁과 이스라엘의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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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는 조에 따라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다시 배치해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저마다 조에 따라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치고 임무를 맡았다. 모든 번제물들과 십일조를 가져와 여러 더미로 쌓아 놓아 바쳤고 각자 몫을 나누어 주어 종교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아시리아]]가 힘을 키워 [[이스라엘 왕국|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성을 함락시켜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왕국]]의 왕 [[호세아 왕]]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에 히스기야는 각 지방의 성들의 방비를 튼튼히 하고 [[아시리아]]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 [[아시리아]]의 1차 침입 ==
이후 마침내 [[아시리아]]의 왕 [[센나케립|산헤립]]이 쳐들어와 히스기야에게 은 300탈렌트와 금 30탈렌트를 요구하며 쳐들어왔다.
 
산헤립은 곧 라키스를 공격하고 휘하 장수 [[랍 사리스]]와 [[랍 사케]]에게 많은 병력을 주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이에 히스기야 왕과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가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며 기도하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아시리아 군대의 모든 지휘관과 장수를 쓸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센나케립|산헤립]]은 수치심을 안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가 자신의 친아들들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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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히스키야가 병들어 죽게 되자 하나님께 기도했고 표징을 주어 15년을 더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바벨론 대사에게 이스라엘의 부와 명예를 보여주는 우를 범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려졌다. 그러자 히스키야는 바로 교만했던 것을 뉘우쳤고 그 이후 히스키야 재위기 동안은 하나님의 진노가 닥치치 않았다.
 
히스키야는 대단한 부와 영광을 누려 은과 금, 보석, 향료, 작은 방패와 온갖 값진 기물들을 보관한 창고를 짓고 수확한 곡식과 포도주, 기름을 저장할 곳집, 온갖 가축 우리와 양 우리들도 지었다. 또한 기혼 샘의 위쪽 물줄기를 막아 뒤잇 성 서쪽 밑으로 돌려 끌어들이는 데에도 성공했다.
 
{{이스라엘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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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구약성경의 인물]]
[[분류:유다 왕국의 군주]]
[[분류:기원전 730년대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