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야누코비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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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페도로비치 야누코비치'''({{llang|uk|Віктор Федорович Янукович}}, {{llang|ru|Виктор Фёдорович Янукович|빅토르 표도로비치 야누코비치}}, {{문화어|윅또르 야누꼬비치}}, [[1950년]] [[7월 9일]] ~ )는 [[우크라이나]]의 정치인이며 [[2010년]] [[2월]]부터 [[2014]]년 [[2월]]까지 우크라이나의 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997년]] ~ [[2002년]]에는 [[도네츠크 주도네츠크주]]의 주지사를 지냈으며, [[2002년]] ~ [[2005년]]과 [[2006년]] ~ [[2007년]] [[우크라이나의 총리|총리]]로 재직했으며, [[2004년]] 총리 재직 중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공식적인 당선자로 발표되었으나, 부정선거 논란으로 인한 [[오렌지 혁명|국민들의 반대]]로 재선거가 실시되어 재선거에서 당선되지 못했다.
 
이후 [[2010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어 5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재직 중, [[2013년]] 말부터 [[유럽 연합]](EU)과의 경제 협력 추진 백지화 정책 실시에 대한 반정부 시위인 [[유로마이단]]의 영향으로 국민들의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던 중, 유로마이단 사건으로 [[2014년]] [[2월 22일]]에 축출되어 대통령직을 상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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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활동 ==
1990년대 초반 정치에 입문하였고, 소련이 붕괴되었다. 이후 동부 공업지대인 [[도네츠크 주도네츠크주]] 주지사를 지냈다. 친[[러시아]] 성향의 [[지역당]]에서 활동하며 도네츠크 주지사로 영향력을 행사했고, 2002년 총선에서 지역당이 포함된 연정이 중앙 정권을 잡아 그도 입지를 굳혔다. [[2002년 11월]], 총리로 임명되어 중앙 정계에 진출했고, 2003년부터 지역당 당수를 지냈다. 2004년 10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빅토르 유셴코]] 후보와 격돌했으며, 1차 투표에서는 근소한 차로 유셴코가 앞섰으나, 유셴코와 야누코비치 모두 다수표는 얻지 못하여 11월, 결선 투표가 치러졌다. 개표 결과 야누코비치가 49.46%의 득표로 대통령 당선인으로 발표되었으나, 선거 부정이 개입되었다는 이유로 유셴코 후보 지지자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오렌지 혁명]]으로 알려진 시위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등 큰 논란 끝에 12월 26일 재선거가 실시되어 결국 유셴코가 다수표를 얻어 대통령 당선인으로 발표되자, 이번에는 야누코비치 후보 지지자들이 반발하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를 뒤집지 못하고 유셴코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야누코비치는 2005년 1월 총리직에서도 축출되었다.
 
그 후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지역당은 2006년 3월 총선에서 최다 의석을 확보했으며,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정국은 다시 여당과 야당의 대립으로 불안이 계속되었다. 지역당은 친러시아 성향의 다른 당들과 연정을 구성, 2006년 8월에 야누코비치는 다시 총리 자리에 올랐고, 야누코비치의 정적이었던 유셴코 대통령은 정국 안정을 위해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이후로도 정국 불안은 계속되어 유셴코 대통령은 2007년 4월 국회 해산을 결정했으며, 이에 따라 조기 총선이 치러졌다. 조기 총선에서 그의 지역당은 제1당의 자리는 유지했으나, [[율리야 티모셴코]]가 중심이 된 다른 당들이 연정을 구성하여 그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고, 티모셴코가 총리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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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렬:야누코비치, 빅토르}}
 
[[분류:1950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