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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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좌의정]]을 역임한 원로대신을 임명했으며, [[좌의정]]·[[우의정]]과 함께 삼공(三公) 또는 삼정승(三政丞 議政)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품계는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이며, 정원은 1명이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에 해당한다. 영의정은 주로 육조의 [[판서]], [[우참찬]]과 [[좌참찬]], [[우찬성]]과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친 사람들이 임명되었다.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치지 않고 영의정에 임명된 사람은 [[심온]], [[구성군 이준]]이다.
 
[[1401년]]([[조선 태종|태종]] 1년) 7월 의정부가 설치될 무렵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라고 하던 것을, [[1466년]]([[조선 세조|세조]] 12년) 1월 관제개정 때 '영의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역대 영의정 중 [[황희]]가 18년 동안 재임하여 가장 오랫동안 영의정을 지냈다. 영의정은 명실공히 국정을 총괄하고 백관을 대표하는 관원으로 다양한 사안을 다루는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중요한 직책이다.[[황희]]에 이어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의정부]]에 들어가 약 20년간 법을 잘 지키고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이라는 최고의 재상으로 평가를 받은 황희의 뒤를 이어 영의정을 지낸 '''[[河演]]''' 이후, 왕권의 강약, [[의정부]]와 [[육조]]의 관계, [[비변사]]의 설치, 여러 상황의 변화에 따라 권한 변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 영사(領事), [[승문원]] 도제조(都提調), [[세자시강원]] 세자사(世子師)를 겸임했다. 조선 말기까지 이어오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일본관제의 영향으로 [[총리대신 (조선 말기)|총리대신]]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뒤에 [[의정대신]],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내각총리대신]]으로 고쳐졌다. 조선 초대 영의정은 [[이서 (1332년)|이서]]가 맡았으며, 마지막 영의정은 [[김홍집]]이 맡았다. 유일하게 왕이 된 영의정은 조선의 7대 왕인 [[조선 세조|세조]]이다. [[종묘배향공신]]을 가장 많이 배출한 관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