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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단학살 수용소는 [[T-4 작전|나치정권의 눈엣가시(대개 공산주의자나 우생학적 불합격자)]]들이 유폐되고 노동착취를 당하던 [[다하우 강제 수용소|다하우(Dachau)]]나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벨젠(Belsen)]] 등 독일 내부에 위치한 [[나치 강제 수용소|집단 수용소]]와 혼동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확실히 구분지어야 하며, 독일의 [[괴뢰 정권|괴뢰국]]들에 설립되어 전쟁포로를 비롯한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하던 수용소들과도 역시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파일:Rail leading to Auschwitz II (Birkenau).jpg|thumb섬네일|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하는 철로]]
 
물론 모든 나치독일의 수용소에서는 기아와 질병 그리고 과로로 인해 굉장히 높은 사망률이 기록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집단학살 수용소는 기존의 수용소와는 달리 수감자의 대량학살만을 위해 설계된 수용소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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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실===
 
[[파일:Holocaust-gas-hair.jpg|thumb섬네일|학살에 사용된 가스의 고형이 담겼던 빈 캔들과 아우슈비츠 박물관에 전시된 주인잃은 머리카락들]]
[[가스실]]을 구비한 모든 집단학살 수용소는 기차를 통해 모든 포로들을 받았다. 때로는 실려온 그대로 가스실로 보내지기도 했지만, 대개 수용소 군의관이 검사하여 [[나치 강제 수용소|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낼 극소수의 인부를 선별하곤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접수 플랫폼으로 보내지고 여기서 모든 소유품들은 나치의 전쟁자금 마련을 위해 압수되었다. 그리고 알몸으로 가스실로 몰아넣어졌다. 간수들은 대개 방역을 위해 샤워를 시키는 것이라고 알리고는 입실이 완료되면 외부에서 ‘입욕’ 등과 같은 신호를 주고받는다. 가끔씩 입실 전에 비누나 수건을 쥐어주어 혹시 모를 유대인들의 공황상태를 예방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긴 여정으로 인해 갈증을 호소하는 인원들에게는 샤워 후에 지급될 커피가 식고 있으니 빠르게 씻을 준비나 하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ref>{{Harvnb|Piper|1998|p=173}}.</ref>
 
[[파일:Birkenau Extermination Camp - Oswiecim, Poland - NARA - 305904.jpg|thumb섬네일|정찰기에 의해 촬영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1944년 9월 13일]]
[[아우슈비츠]]의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Rudolf Höss]]에 의하면, 벙커1은 800명을 벙커2는 1,200명을 한번에 ‘처분’할수 있었다고 한다.<ref>{{Harvnb|Piper|1998|p=162}}.</ref> 일단 가스실에 입실이 완료되면 모든 문은 잠기고 고체 알갱이상태의 [[치클론 B]]가 측벽의 환기구를 통해 투여되고 이는 곧 유독한 [[사이안화 수소]]를 내뿜는다. 1/3이 즉사하고 20분 이내에 환기구에 가까운 쪽부터 모든 입실자들이 사망하게 된다.<ref name = "Piper 1998 170">{{Harvnb|Piper|1998|p=170}}.</ref> 가스실을 감독하던 SS군의관으로 근무했던 Johann Kremer는 “고함과 비명이 가스실의 모든 틈새를 통해 들려왔고, 이를통해 그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알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ref name = "Piper 1998 163">{{Harvnb|Piper|1998|p=163}}.</ref> 희생자들이 모두 숨을 거두고 난 실내는 대개 아비규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뒤틀린 채 죽은 이들의 피부는 붉거나 푸른 반점들로 가득했고 일부는 거품을 물거나 귀에서 피를 흘렸다.<ref name = "Piper 1998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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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의 정의와 평가====
[[파일:Stroop Report - Warsaw Ghetto Uprising 06b.jpg|thumb섬네일|바르샤바 게토 봉기(1943.1)<br />체포되어 방공호에서 강제로 연행되어나가는 유대인들
<div style="text-align:right; width:auto; 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Heinrich Himmler에게 보고된<br />Jurgen Stroop의 Stroop Report에서</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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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력봉기 및 연합군/저항군과의 연계====
[[파일:Stroop Report - Warsaw Ghetto Uprising 13.jpg|thumb섬네일|170px|연행되어온 유대인 레지스탕스, 바르샤바 게토, 1943]]
 
물론 무력저항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게토]]에서 비롯된 봉기의 일례로는 1943년 1월, 조악한 무장을 갖춘 유대인들이 SS부대를 4주나 지연시키다 독일 측 원군에 의해 패배했던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있다. 이 전투로 유대인 13,000명이 전사하고 57,885명이 추방되거나 집단학살 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 측 피해는 진영별로 극명하게 갈리는데, 유대인 측 자료에는 독일군 수백명을 사살했다고 적혀있지만 독일 측에는 17명 사망에 93명 부상으로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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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가장 유명한 저항사례로는 [[바르샤바 봉기]]가 있다. 1944년 8월 1일부터 2달간 지속된 이 봉기는 Tadeusz Bór Komorowski 장군에 의해 주도되어 하루만에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해방지구를 형성하는데에 이르렀다. 하지만 또다른 대규모 봉기를 우려한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에 의해 강경진압이 결정되어, 봉기군 전원과 더불어 20만명에 가까운 시민이 학살되었다. 결국 바르샤바는 1943년의 게토 봉기와 1944년의 무력봉기를 거치면서 초토화되었다.
 
[[파일:Bundesarchiv Bild 101I-267-0111-36, Russland, russische Kriegsgefangene (Juden).jpg|thumb섬네일|170px|독일군에 붙잡힌 유대계 소련군 전쟁포로, 1941.8월<br />대전중 50만명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소련군으로 복역했다.]]
동유럽에서는 약 2~3만의 유대인이 나치와 그 동맹들을 상대로 [[파르티잔|Partizan]]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했고,<ref>{{Harvnb|Kennedy|2007|p=780}}.</ref><ref name=USHMM_RES>[http://www.ushmm.org/education/foreducators/resource/pdf/resistance.pdf "Resistance During the Holocaust"]. ''Holocaust Encyclopedia''.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Retrieved 27 September 2012.</ref> [[리투아니아]]에서만 3천이 넘는 독일군이 이들에게 사살되었다. 이들은 주로 게릴라전과 함께 독일군 기반시설에 대한 [[사보타주|Sabotage]]를 벌였고, 이따금 게토의 봉기를 유도하거나 수용소의 탈출을 돕기도 하였다. 특히나 유대인 비중이 높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에서는 집단학살 수용소의 비극에서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네덜란드 전역에서도 활발히 게릴라를 벌였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Dutch Resistance에 가담하여 활동했다.<ref>{{Harvnb|Klempner|2006|pp=145–14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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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치 정부의 일반 부문 중 유대인 [[게토]]의 강제노동에 기반한 군수산업의 생산성은 손에 꼽을 정도로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Final Solution의 실행으로 인해 1943년 모든 게토의 생산은 중단되고 유대인들은 집단학살 수용소로 보내지게 되었다. 이 일환으로 1943년 초, 바르샤바 게토에서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 이송되어 학살되었고 이로 인해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발생했지만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1943년 11월 3일 단 하루만에, 마이다네크(Majdanek) 수용소와 인근 캠프들에서는 추수감사 작전(Aktion Erntefest)라는 이상한 작전명 아래 4만2천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사살되었다. 러시아 점령지에서 잡힌 유대인들도 실려오는 족족 그 자리에서 사살한 이 작전은, 나치독일이 자행한 최대의 유대인 단일 학살작전로 기록되었다.<ref>[http://www.ushmm.org/wlc/en/article.php?ModuleId=10005222 "Aktion 'Erntefest' (Operation 'Harvest Festival')"]. ''Holocaust Encyclopedia''.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Retrieved 27 September 2012.</ref>
[[파일:Bundesarchiv Bild 101I-680-8285A-08, Budapest, Festnahme von Juden.jpg|thumb섬네일|1944.8.20-22, 헝가리 부다페스트.<br />붙잡힌 유대인 여성들]]
 
독일에서 유대인 수송차량은 철로 상에서 가장 우선권을 가졌었다. 심지어 1942년 끝자락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지독한 소모전이 벌어지고, 기반시설과 철도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이 가중되던 시점에도 이 철칙은 지켜졌다. 이 때문에 군수품의 우회와 연착이 빈번하게 발생해 육군 사령관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물론 숙련된 유대인 기술자들과 고학력자들이 처형이 예약된 상태로 이 차량들 속에 실려있었기 때문에 경제 부처와 경영인들의 눈길도 고울 순 없었다. 더군다나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을 수록 패전의 기색이 역력해졌기 때문에, 사실상 나치의 광신도가 아니라면 누구나 전후 전범처리에 대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권한을 쥐고 흔드는 [[하인리히 힘러]]와 강력한 [[SS]]의 억제력 때문에, 기본적인 군사적, 경제적 우선순위 따윈 안중에도 없는 Final Solution를 지켜보면서도 정작 반발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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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은 하나입니다. 이들에게 처자식이 있으면 대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결국 이 자리에 와서야 명쾌한 해답을 얻은 것 같습니다.<br />저는 이것들을 박멸하는데 있어서 후환이 남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후환이 어린아이의 탈을 쓰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이것들을 멸종시키기 위해서 약간은 꺼림칙한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하인리히 힘러]], 1943.10.4. 폴란드 [[포젠]]의 나치 고위당원 모임에서}}
[[파일:Bundesarchiv Bild 183-N0827-318, KZ Auschwitz, Ankunft ungarischer Juden.jpg|thumb섬네일|1944,봄. 체코 동부에서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유대인 여성과 아이들]]
 
이 모임에는 해군 제독 [[카를 되니츠]]와 전시 군비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도 참석했었다. 이들 중 [[되니츠]]는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파이널 솔루션]]이라는 계획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했고, 이는 재판에서 인정 되었다. 재판이 벌어지던 당시에는 [[히믈러]]의 녹취록의 존재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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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애자 ====
[[파일:ac.homomonument.jpg|thumb섬네일|[[암스테르담]]에 위치한 나치에게 희생당한 [[동성애]]자들을 추모하는 호모모뉴먼트(Homomonument)]]
나치 독일에서는 실질적 범죄 행위보다 범행의 동기나 개개인의 자질 등을 문제시 삼았으며, ''"gesundes Volksempfinden"''(건강한 국민 정서)이 나치 독일의 새로운 규범적 원칙이 되었다.<ref name=Steakley>Steakley, James. [http://www.fordham.edu/halsall/pwh/steakley-nazis.html "Homosexuals and the Third Reich"], ''The Body Politic'', Issue 11, January/February 1974.</ref> 1936년 하인리히 히믈러는 '[[동성애]]와 [[낙태]]를 방지하기 위한 제국 중앙 사무국'을 설립하였다.<ref>{{Harvnb|Longerich|2012|p=237}}.</ref> 곧 동성애는 '건강한 국민 정서'에 반하며,<ref name=Chronicle108/> 독일혈통을 더럽히는 것으로 선언되었다. 게슈타포는 [[게이바]]를 습격하였으며, 체포한 동성애자의 개인 연락처와 [[성소수자]] 신문 및 잡지 등을 이용하여 다른 동성애자들을 추적하였다. 또한 이웃에 동성애자나 동성애자인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다면 신고할 것을 대중에 종용하였다.<ref name=Chronicle108/><ref name=Steakl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