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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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과 의혹 ==
=== 수령 무오류론의 희생양 ===
[[파일:1946-07-23 초대 대통령 후보 지지율.jpg|thumb섬네일|오른쪽|250px|한국여론협회에서 1946년 7월 조사 발표한 초대 대통령 예상 후보 지지율 (1946-07-23 동아일보) : 이승만 1916표 (29%), 김구 702표 (11%), 김규식 694표 (10%), 여운형 689표 (10%), 박헌영 84표 (1%), 기타 110표 (2%)]]
 
정치학자 [[최장집]]은 박헌영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봤다. 박헌영은 [[북조선]] [[수령 무오류론]]의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김일성 유일체제하에서 독자적인 한국형의 사회주의체제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1952년]] [[12월]] 5차전원회의를 계기로 박헌영,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계의 제거를 통하여 휴전이 후 제기 될 수밖에 없는 전쟁책임을 물어 가장 강력한 남로당세력을 최종적으로 숙청함으로써 김일성 리더쉽의 불가오류를 확인하고 유일체제를 강화하는 길로 나갔다.<ref name="muoh">[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110570434 <nowiki>[</nowiki>최장집 논문<nowiki>]</nowiki> 한국전쟁에 대한 하나의 이해 4-5장] 조선일보 1998.11.05</ref> [[최장집]]은 박헌영의 숙청을 북조선의 김일성 독재 체제가 확립된 시점으로 간주했다.<ref name="mu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