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해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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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1=
{{국기나라|미국|1912}}<br />
{{국기나라|자유 프랑스}}
|교전국2=
{{국기나라|나치 독일}}<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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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버로드 작전 ===
{{본문|오버로드 작전|노르망디 상륙 작전}}
[[파일:Leclerc-casque.jpg|250px|thumb섬네일|자유 프랑스의 유명한 장군 중 하나인 필리프 르클레르.]]
[[연합군]]의 전략은 [[라인 강]] 쪽으로 후퇴하는 독일군의 전력을 파괴시키는데 있었다.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파리]]를 주요한 목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미군]]과 [[영국군]]은 [[소련군]]의 공산화 우려로 최대한 빨리 [[베를린]]을 함락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파리 침공이 너무 이르다고 판단했다. 아이젠하워는 파리 전투가 소모전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아서 독일군에게 도시의 완전한 파괴를 지시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파리가 폐허가 될 경우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너무나 큰 가치의 손실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포위전]]이 발발하면 파리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많은식량이 요구될 것이라 추정되었다. 현저한 양의 건물과 인구, 그리고 기술공들 역시 파리 해방 이후에 요구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부활한 프랑스군의 [[샤를 드 골]] 장군은 프랑스 제 2부대에게 파리로 진격하라고 명령할 것을 강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