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독립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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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간 중 남부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프랑스]]의 [[노르파드칼레]])는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남게 되었다. 이 지역은 [[네덜란드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리슐리외]]와 [[루이 14세]]의 지원을 받아 1630년대까지 계속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와 대항하였다. 1648년 전쟁이 종결된 후 남부 네덜란드의 상당 부분이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 전쟁의 초기 쟁점은 네덜란드의 독립이었으나 전쟁기간 중 [[네덜란드 공화국]]이 사실상 독립국으로서 기능하였으며, 1618년부터는 [[30년 전쟁]]의 일부가 되어 국제전으로 변하게 되었다.
== 배경 ==
[[파일:Spanish Empire around 1580.png|thumb섬네일|1580년, 유럽의 스페인 제국 영토]]
[[파일:Map-1477 Low Countries.png|thumb섬네일| 1477년 경의 네덜란드 지역]]
=== 독립전쟁 이전의 네덜란드: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
합스부르크 왕가의 [[부르고뉴 대공]]은 결혼 정책과 정복으로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네덜란드 17주]]도 이렇게 확장된 [[부르고뉴]]의 영토중 하나였다. [[1477년]] [[겐트]]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카를 5세]]가 태어날 당시, 부르고뉴는 프랑스령이 되었으나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는 여전히 그의 영지로 남아있었다.<ref> [[요한 호이징하]](1997). 《[[중세의 가을]]》(독일어판- Herfsttij der Middeleeuwen), 26th (1st - 1919), Olympus. {{ISBN|90-254-1207-6}}.</ref> 카를 5세는 현재의 벨기에 겐트에서 태어났으며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에스파냐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다.<ref>Kamen, Henry (2005). Spain, 1469–1714: a society of conflict, 3rd, Harlow, United Kingdom: Pearson Education. {{ISBN|0-582-78464-6}}.</ref> 카를 5세는 1505년 네덜란드를 포함한 [[부르고뉴 공국]]의 군주가 되었다. 그 뒤 1516년 그는 [[아라곤 왕국]]의 국왕,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그리고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식민지]]의 국왕이라는 지위를 상속한다. 또한 [[1519년]]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1530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이로써 카를 5세는 광대한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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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초기 (1555년 - 1572년) ==
[[파일:Philip II.jpg|thumb섬네일|[[스페인의 펠리페 2세]] ]]
 
=== 고조되는 갈등(1555년 - 156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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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상파괴와 압제 (1566년) ====
{{참조|괴젠}}
[[파일:Detail_of_a_portrait_of_Fernando_Alvarez_de_Toledo_by_Antonio_Moro.jpeg|thumb섬네일|'''알바 공'''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1565년]] 네덜란드는 [[북방 7년 전쟁]]의 여파와 흉년이 겹쳐 경제가 침체되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네덜란드에는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신자들을 중심으로 [[반란]]의 기운이 가득차게 되었다. [[1566년]] 8월 [[플랜더스]]의 혼트슈테 교회를 습격한 칼뱅주의자들은 교회에 있던 [[가톨릭 성인]]의 [[성상 파괴|성상을 파괴]]하였다. 이는 당시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성상 파괴 운동 중의 하나였다. [[성서]]주의자들인 [[칼뱅주의자]]들은 성상이 [[십계명]]에서 금지한 [[우상 숭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성상파괴를 정당화 하였다. <ref>Van der Horst, Han (2000). Nederland, de vaderlandse geschiedenis van de prehistorie tot nu (in Dutch), 3rd, Bert Bakker, 133. {{ISBN|90-351-2722-6}}. </ref> 성상 파괴에 참여한 인원은 적었으며<ref>Limm (1989)은 당시 북부지방에서는 성상파괴에 가담한 인원이 2백여명 이하이며, 남부지방에서는 보다 대규모 군중이 성상파괴를 위해 무리지어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다. (p. 25).</ref> 그들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지방 정부는 그들의 파괴행위를 방관하였다.<ref>See Spaans (1999)는 당시 성상파괴 가담자들이 지역에서 정치력을 행사하는 [[엘리트]]들이였으며 이들은 정치적 이유로 성상을 파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52 ff. (Spaans, J. "가톨릭과 북부 네덜란드의 저항운동". 《1555년 - 1585년, 프랑스 및 네덜란드의 내전, 개혁, 반란 등》,Benedict, (Amsterdam 1999), 149-163).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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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라녜공 빌렘 1세 ====
{{본문|오라녜 공작 빌렘 1세}}
[[파일:WilliamOfOrange1580.jpg|thumb섬네일|1580년, 오라녜 공 빌렘 1세]]
[[오라녜 공작 빌렘 1세]]는 [[홀란트]], [[제일란트 주|젤란트]], [[위트레흐트 주|위트레흐트]]의 영주이자 [[앤트워프]]의 [[후작]]이었으며 펠리페 2세에 대한 청원에 앞장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네덜란드 의회의 의원이었다. 알바공이 [[에그몬트 백작 라모랄]]과 [[호른 백작 필립 드 몽모랑시]]를 처형하자 빌렘 1세는 체포를 피하기 위해 그의 영지를 장인이었던 [[삭소니]]의 [[선제후]]에게 넘겼다. 펠리페 2세는 빌렘 1세의 네덜란드에서의 모든 지위와 영지를 몰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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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 동맹과 위트레흐트 동맹 ===
[[파일:Map-1579 Union of Utrecht.png|thumb섬네일|1579년 아라동맹과 위트레흐트 동맹의 세력권<br />노란색-아라동맹<br />하늘색-위트레흐트 동맹]]
[[1579년]] [[1월 16일]] 페르네제는 바룬 프랜더스(지금의 프랑스 아라와 벨기에의 [[왈로니]])에서 북 네덜란드와 개신교에 대항하는 가톨릭교도들을 중심으로 아라 동맹을 결성한다. 이로 인해 3년간 유지되던 간트 협약은 붕괴되었고 종교적 관용을 바탕에 둔 독립을 희망했던 [[네덜란드 17주]]의 초기 목표역시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1월 23일 빌렘 1세는 아라 동맹에 대한 대응으로 북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하는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로써 네덜란드 17주는 에스파냐 국왕의 휘하에 있는 남부와 반군의 통치를 받는 북부로 양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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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적함대의 패배 ===
[[파일:Loutherbourg-Spanish Armada.jpg|thumb섬네일|무적함대의 패배를 그린 그림, 1797년 작]]
{{본문|무적함대}}
{{참고|프랜시스 드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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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의 승전 ===
{{참고|지브롤터 해전}}
[[파일:Battle of Gibraltar 1607.jpg|thumb섬네일|1607년 지브롤터 해전에서 네덜란드와 스페인 해군이 격돌하다.]]
네덜란드는 1600년 [[니우포르트 전투]]와 1607년 [[지브롤터 해전]]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로써 [[네덜란드 공화국]]은 에스파냐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기에 이른다. 전쟁의 승리를 통해 에스파냐의 지배를 물리친 네덜란드는 이후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2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 제국]]은 [[인도네시아]], [[싱가폴]] 등을 식민 지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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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30년 전쟁}}
=== 다시 시작된 전쟁 ===
[[파일:Velazquez-The Surrender of Breda.jpg|thumb섬네일|1622년 스페인의 브레다 함락]]
 
영구 평화 조약 체결을 위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의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협상 결렬의 첫 번째 원인은 종교적 문제였다. 에스파냐는 북부 네덜란드 내의 [[로마 가톨릭]] 신도에 대한 종교적 자유를 요구하였으나 네덜란드가 똑같은 조건으로 남부 네덜란드의 [[개신교]] 신도들에 대한 종교적 자유의 인정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였다.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에서 아메리카에 이르는 양국의 식민지에 대한 권리 문제였다. 결국 평화 조약 협상의 결렬은 전쟁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양국이 [[30년 전쟁]]에서 충돌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