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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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원균(元均)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 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ref>선조 25권, 24년(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4일(신미) 1번째 기사, 간원이 초수된 전라 좌수사 원균의 체차를 청하다</ref>}}
 
그 뒤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을 따라 우위 부대를 지휘한 위장(衛將)인 온성부사 양대수(楊大樹)의 수하우위 1계원장(一繼援將)으로 참전해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하는데 참여하였으며 이 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인 [[1592년]](선조 25년) [[음력]] [[1월]]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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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출동 ====
[[파일:Geojedo Okpoman.jpg|thumb섬네일|180px|해전이 벌어졌던 옥포만에는 오늘날 [[대우조선해양]]이 건조한 배들이 지나간다]]
 
{{참고|옥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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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도 대첩 ====
[[파일:HansanBattle-heseungdang.jpg|thumb섬네일|right|180px|[[한산도 대첩]]도]]
{{본문|한산도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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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이때부터 둘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그해 [[음력]] [[9월]] [[자헌대부]] [[중추부]]지사(知事)로 승진하였다.
 
[[파일:Lee San-hae 01.jpg|thumb섬네일|140px|right|[[이산해]]<br />(동인 중 원균의 몇안되는 후원자였으며, 동인의 분당 때에는 북인의 영수가 된다.)]]
 
[[이순신]]이 [[남인]]인 [[유성룡]]과 [[권율]]과 친분관계가 있어 [[이원익]] 등 [[동인]]으로부터 호평을 얻자 [[윤두수]] 등의 [[서인]]들은 원균을 옹호한다. [[동인]] 중 아계 [[이산해]] 등이 이례적으로 그를 변호하고 그를 지원하였는데, [[이산해]]는 [[정철]]의 처벌 문제와 [[우성전]]의 기생 첩 문제를 감싸는 문제로 [[유성룡]], [[권율]] 등과 알력이 있었고, 이들을 불신했다. [[유성룡]], [[권율]] 등에 대한 불신은 원균에 대한 호평으로 이어졌고, 동인이 남북인으로 분당한 뒤에는 [[북인]]들 역시 원균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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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도 전투 ====
[[파일:Korea-Geoje-Gohyeon Castle-01.jpg|thumb섬네일|230px|거제 고현성]]
 
그러나 원균은 통제사가 되자 역시 나가기를 주저했다. 원균은 '적이 거짓말로 속임을 미루어 살피고서 아군의 힘으로는 부산 바다로 들어가 토벌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조정에서 듣지 않자, 또 아뢰기를, '그렇다면 안골포와 가덕도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먼저 육군으로써 몰아낸 이후에야 들어가 싸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ref name="원균 행장, 김간 찬"/> 하지만 원균이 이순신 대신 통제사가 된 것은 스스로 부산포에 나가겠다는 상소 때문이었고, 당시 조선의 병력 동원능력을 넘어선 30만의 육군이 출동해 섬인 가덕도를 수군이 아닌 육군으로 쳐 달라는 비현실적인 주장 때문에 이를 듣지 않았다.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종사관 [[남이공]](南以恭)을 보내서 전투를 재촉하였다. 97년 3월 25일 원균은 통제사가 된 후 승전을 보고하는데, 거제도로 나무하러 온 왜적 80여명을 강화 회담 중이라는 걸 핑계로 술을 먹여 안심시킨 후 부산포로 돌아가게 해 주었다가 조선 수군 전체가 공격하여 전멸시켰다는 것이었다.<ref>[[조선왕조실록 97년 3월 25일]]</ref> 비변사에서는 나무하러 온 적을 잡아서 공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지만 선조는 나무하러 온 적 역시 적이라면서 상을 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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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밤에 왜적이 비밀히 작은 초탐선(哨探船)을 보내 아군 선단의 사이로 몰래 잠입하였고, 또 병선으로 몰래 밖을 포위하였으나 군중(軍中)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파일:칠천량 해전.jpg|thumb섬네일|right|180px|[[회본태합기]]에 수록된 [[칠천량 해전]]도]]
 
[[음력 7월 16일]] 새벽 [[칠천량]]에 정박했으나 그날 아침 조선군 선박에서 불이 나자, 봉화를 피운뒤 급히 북을 치고 바라를 불어 [[경상우수영]]에 변고를 알렸으나 왜군이 밀려왔다. 원균 행장에 의하면 '문득 보니 적선이 사방에서 충돌해 오며 탄환을 비처럼 쏘고 함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형세가 산이 무너지는 듯, 바다를 말아올리는 듯하여 막을 수가 없었다.<ref name="원균 행장, 김간 찬"/>'고 한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닻을 올리고 먼저 달아나니 아군이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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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관작 ====
[[파일:Seonmookongsinlist01.jpg|thumb섬네일|right|200px|선무공신 리스트<br />[[이순신]], [[권율]]에 이어 세 번째에 원균의 이름이 보인다.]]
[[파일:원균선무공신교지01.jpg|thumb섬네일|left|200px|원균의 [[선무공신]] 교지 ([[1603년]])]]
{{참고|선무공신}}
[[1603년]] 음력 6월 [[선무공신]] 훈1등에 녹훈되었고 증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겸 판[[의금부]]사 원릉군(原陵君)에 추봉되었다. [[1605년]] 왕이 내린 치제문과 [[조선 숙종|숙종]] 때의 대사헌 김간(金幹)이 편찬한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統制使元均贈左贊成公行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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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파일:원균선무공신교지02.jpg|thumb섬네일|left|200px|원균의 [[선무공신]] 교지 ([[1603년]])]]
 
원균은 고기를 매우 좋아하고 장수답지 않게 체구가 비대했다.<ref>조경남, [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b002&gunchaId=av003&muncheId=&finId=005&NodeId=mk_s_all-kc_mk_c003 난중잡록 3] 정유년 7월 13일</ref> 원균은 엄청난 비만이였다. 이러한 원균의 체형과 무능함을 조합해서 [[전라남도]] [[곡성]]에 사는 생원인 오천뢰(吳天賚)는 원균을 비꼬는 한시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