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빅토르 마리 모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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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군사 경험 ===
[[파일:Jean Victor Marie Moreau (1792).jpg|thumb섬네일|upright|1792년 [[일에빌렌]]의 의용군 중령 시절의 모로.]]
 
1791년 모로는 [[일에빌렌]](llle-et-Vilaine)의 의용군 중령으로 선출되어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의 지휘하에 근무하였고, 1793년 모로의 [[대대]](battalion)는 좋은 명령을 받아 그의 고유의 군인다운 캐릭터와 공화정의 원칙에 따라 여단장으로 승진하는 길을 확보했다. 1794년 초기 [[라자르 카르노]]에 의해 모로는 사단장으로 승진했고, [[플랑드르]]에서 [[샤를 피슈그뤼]]가 지휘하는 군대의 좌익을 맡았다.
 
=== 특별한 은퇴 ===
[[파일:Général JEAN VICTOR MOREAU.jpg|thumb섬네일|upright|장 빅토르 모로]]
 
1794년 [[투르쿠앵 전투]](Battle of Tourcoing)에서 모로는 군사적 명성을 쌓았고, 1795년 라인과 모젤의 군대를 맡아 지휘하면서 라인을 가로질러 독일로 진격했다. 모로는 첫 임무를 완벽하게 성공함과 동시에 여러 번 승리를 거두고 [[이사르]](Isar)까지 통과했으나 마지막에는 [[테셴 공작 카를 대공]]에게 패배했다. 그렇지만 모로는 퇴각을 지휘하면서 솜씨를 발휘해 –이런 작전의 모델을 고려해- 개인적인 명성은 매우 높아졌고, 더욱이 그가 잘 해내고 되돌아올때 약 5,000명의 포로를 데리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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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는 퇴역했지만 1799년 보나파르트의 부재와 승승장구하는 러시아 사령관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를 저지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과 경험이 있는 장군이 이탈리아에 필요해 재기용되었다. 모로는 [[이탈리아 군 (프랑스)|이탈리아 군]]을 지휘해 작은 성공을 거두고, 짧은 시간 이전에 있었던 라인 군(Army of the Rhine)에 지명되었으나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후임자인 [[바르텔레미 카트린 주베르]]와 함께 남아 [[노비 전투]](battle of Novi)때까지 싸우다 패배했다. 전투에서 주베르가 전사하자 모로는 [[제노바]]에서 군대의 철수를 지휘했고, [[장 에티엔 샹피오네]](Jean Étienne Championnet)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보나파르트가 [[이집트]]에서 돌아오자 모로를 파리로 소환했고, [[프랑스 독재 정부]]에 크나큰 불만을 가지고 있던 장군들과 공화당원들이 [[18 브뤼메르]](18 Brumaire)의 [[쿠데타]]에서 모로를 지원해 성공했다. 모로는 군대를 지휘해 [[뤽상부르 궁전]](Luxembourg Palace)에서 2명의 독재관을 감금시켰다.
 
[[파일:Bataille de Hohenlinden.jpg|thumb섬네일| [[호엔린덴 전투]].]]
 
그 보답으로 나폴레옹은 모로를 라인 군 사령관에 재임명했고, 모로의 군대는 이사르와 라인 강에서 [[오스트리아]]를 물러나게 했다. 모로는 파리에 돌아와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친구인 [[크리올]] 여성인 밀르 위로(Mlle Hullot)라는 야심만만한 여성과 결혼했는데, 그는 밀르에게 사로잡혀 버렸다. 이후 몇 주의 시간을 보낸 후 독일에서 군대를 이끌고 경축할만한 [[호엔린덴 전투]]의 승리로 전역기간 그가 거둔 즐거움과 행운으로 해결되었다. 모로의 아내는 나폴레옹의 권력강화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모았다. 이 "클럽 모로"(Club Moreau)를 나폴레옹은 성가시게 생각했지만 왕당파에게는 힘이 되었다. 모로는 공화국의 회복을 위해 군사 독재관을 맞이하는 것에 내키지 않았지만 [[루이 18세]]를 복권시키려는 음모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모로를 공모자로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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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 적대자들 위한 조언과 죽음 ===
[[파일:La mort du général Moreau-Auguste Couder mg 8221.jpg|thumb섬네일|''모로 장군의 죽음'', 오귀스트 쿠더 (묘사)]]
 
모로는 아내의 선동으로 유럽에 돌아옴과 동시에 공화주의자 음모자들의 모임의 옛 친구들과 협상하기 시작했다:이전 장-밥티스트 베르나도트, 현재 스웨덴의 카를 요한 공(훗날 국왕 [[스웨덴의 카를 14세 요한]]). 카를 요한과 차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을 상대로 함께 군대를 일으켰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이끌었다. 모로는 나폴레옹의 패배와 공화국 정부가 세워지는 것을 보기를 희망했다. 모로는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도자들에게 프랑스를 패배시키는 가장 최선의 방법 등을 조언하는 역할을 맡았다. 모로는 1813년 8월 27일 [[드레스덴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차르와 대화를 나눈 뒤 [[라우니]](Louny)에서 9월 2일 사망했다. 모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 카타리나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 of St. Catherine)에 매장되었다. 모로의 아내는 차르로부터 연금을 받았고, [[루이 18세]]로부터 ''원수''(maréchal)의 지위를 하사받았으나 모로의 동향인들은 모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변절자" 라며 뒤무리에와 피슈그뤼에 비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