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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연행록-01.jpg|thumb섬네일|250px|연행록]]
'''김창업'''(金昌業, 1658 ~ 1722)은 [[조선]] 후기의 [[화가]]·학자이다. 자는 대유(大有), 호는 노가재(老稼齋) 또는 가재(稼齋), 본관은 안동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다. 또한 단원 [[김홍도]]의 스승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당색은 [[서인]], [[노론]]이다.
 
== 생애 ==
[[파일:Korea-Portrait of Song Si-yeol in 1689-joseon.jpg|thumb섬네일|right|140px|[[1689년]] 그가 그린 [[송시열]] 영정]]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이며 진사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입교 [[성균관]][[진사]]가 되었으며, 동몽교관과 통덕랑을 지냈다.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사되자 관직에 뜻을 버리고 시문과 학문, 그림 등을 교육하였다. 시문과 그림에 뛰어났으며 단원 [[김홍도]]의 스승 중의 한사람이다.
 
[[괴산군]] 화양 서원에 있는 [[송시열]]의 화상은 그가 그린 것을 화공이 그대로 베낀 것이다. [[조선 숙종|숙종]] 때 형인 김창협과 [[베이징|북경]]에 다녀와서 기행문 〈연행록〉을 썼다. 저서로 〈노가재집〉이 있다.
 
[[1722년]](경종 2년) 그가 개인적으로 땅을 개간하여 열무장(閱武場)을 만든 것을 두고 [[대간]]에서 탄핵하여 폐쇄시키기도 하였다. [[1792년]](정조 16년) [[6월 3일]] 손자 김이익(金履翼)이 통정대부 수충청도관찰사(종2품직)에 임명되었으므로 증조부였던 그는 법전에 따라 증 통훈대부 사복시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