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강화 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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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결과는 독일과의 베르사유 조약 체결이었다. 조약의 제231조에 따르면 독일과 그 동맹국의 공격성이 전쟁에 대한 죄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시야는 독일에게 굴욕감을 주고, 독일에 대한 광범위한 보복조치에 대한 기반이 되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미국]]이 회담을 통제했다.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이탈리아 총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가 회의를 주도했다. 이들은 비공식적으로 145회 이상 만나 모든 주요 결정을 내렸고, 이후 다른 사람들이 이를 승인했다.<ref name="Rene Albrecht-Carrie 1958 p. 363">Rene Albrecht-Carrie, ''Diplomatic History of Europe Since the Congress of Vienna'' (1958) p. 363</ref> 회담은 1919년 1월 18일에 개최되었고, 마이클 네이베르크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공식적인 평화 과정은 [[로잔 조약]]이 체결되던 1923년 7월이 되어서야 완료되었다.<ref name="Neiberg2017">{{cite book|author=Michael S. Neiberg|title=The Treaty of Versailles: A Concise History|url=https://books.google.com/books?id=ShonDwAAQBAJ&pg=PP10|year=2017|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isbn=978-0-19-065918-9|page=ix}}</ref>
 
.== 전반적인 결과 ==    
 
== 파리 강화 회담에 대한 평가 ==
파리 강화 회담의 세계 지도자들은 세계 2차 대전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여러가지 중대한 갈등을 낳았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민족 자결 주의의 원칙이었던 윌슨의 14개 조항은 10월 혁명과 전쟁 종식을 위해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던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여러 혁명에 영향을 끼쳤었다.  
 
=== 한국의 독립운동과의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