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 최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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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 최씨'''(隋城 崔氏)는 [[경기도]] [[수원시]]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 시조역사 ==
'''최영규'''(崔永奎)는 본래 [[구 안동 김씨]]인 신라 경순왕의 김부(金傅)의 13세손으로 추정된다.<ref>몇 세손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1760년에 발간된 족보에는 17세손이라 했고 그 이후부터 1957년까지는 18세손이라 했으며 1977년에는 13세손, 1997년에는 11세손으로 바꿔 발간했다.</ref> 그는 [[1261년]]([[고려 원종]] 22년) 문과에 급제하여 남조전서(南曹典書)에 재직하면서 보문각대경(寶文閣大卿)을 겸직하였고, 서경(西京)의 학도(學徒)들을 맡아 가르쳤다. 충렬왕 때 수주(水州) 일대의 풍속이 퇴폐한 것을 왕이 개탄하자, '군신 가운데 누가 이를 다스려 풍속을 순화 하겠느냐?' 하니 그가 자청하여 호장으로 부사 안설과 함께 효도로 인도하고 의리로 설복하니 1년이 못되어 크게 변했다고 한다. 이에 [[1302년]]([[충렬왕]] 28년) [[충렬왕]]은 그를 수성백(隋城伯)에 봉하고, 그 공이 최외와 같다 하여 그에게 최(崔)씨 성을 하사하였다하사하였다고 한다. 최영규의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화성군]] [[매송면]] 어천리에 있다.
 
한편, 고려시대 서운부정(書雲副正)을 지낸 최거경(崔居經)을 시조로 하는 또 다른 계통도 있다.
 
하지만 윗글은 단순히 설화로 보이며, 대한민국의 성씨는 고려시대 중반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대중화 되기 시작하였다. 성씨는 일반적으로 임금이 관료에게 하사한 것으로, 조선 초기에는 성을 가진 사람들은 왕족과 일부 권문세가 양반 등에 국한되어 그 수는 매우 적었다. 조선시대 성씨가 있던 양반의 비율은, 조선초기 10%이하 ~ 조선후기 50%이하이며 , 따라서 성씨가 없던 50~60%의 노비천민들은, 일제시대 1909년 일본의 성씨 부여 정책, 즉 민적법 시행으로 , 노비천민들도 마음대로 원하는 성씨와 본관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노비천민들은 족보에 올릴 조상들이 없었으니 , 생각해낸게 설화를 그럴싸하게 만들거나, 과거 중국의 유명인물이나 한반도에서 유명한 인물들을 끌어다가 , 자기족보에 선착순으로 올려서 성씨와 본관을 이어붙이는 행위가 성행하였고 , 이러한 족보세탁 작업중에 조상이 서로 겹치는 웃지못할 경우가 많아 , 어쩔 수 없이 생면부지의 사람(노비천민들끼리)들끼리 족보를 합쳐서 같은집안으로 만들어버리는 , 합본행위도 성행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조선시대 사이에 만들어진 성씨들만 진짜 양반성씨라고 볼 수 있다.
 
왜냐면 고려왕건이나 조선왕조의 허락없이는, 함부로 성씨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과거 급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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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
* [[최유림]](崔有臨, 1426년 ~ 1471년) : 1450년(세종 32) 무과에 급제하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녹훈되고 수성군(隋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 [[최영희 (1921년)|최영희]](崔榮喜, 1921 ~ 2006) : 16대 국방부 장관
* [[최종건]](崔鍾建) : [[SK그룹]] 창업주
* [[최종현]](崔鍾賢) : SK그룹 회장
* [[최태원 (기업인)|최태원]](崔泰源) : SK그룹 회장, 최종현의 장남
* [[최신원]] : SKC그룹 회장, 최종건의 차남
* [[최창원]] : SK가스 부회장, SK케미칼 부회장, SK 와이번스 구단주, 최종건의 삼남
* [[최창원]] : SK디스커버리 부회장, SK가스 부회장
* [[최태원 (기업인)|최태원]](崔泰源) : SK그룹 회장, 최종현의 장남
 
== 항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