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량: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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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량'''(尹元亮, [[1495년]] ~ [[1569년]])은 조선 중기의 척신이다.무신이자 척신이며, 자(字)는 명숙(明淑), 본관은 [[파평 윤씨|파평]](坡平),이다. 파산부원군 [[윤지임 (1475년)|윤지임]](尹之任)의 아들이며 [[윤원형]](尹元衡)·[[윤원로]](尹元老)의 형이다. [[조선 중종|중종]]의 제3계비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친정 오빠이자, [[조선 명종|명종]]의 외삼촌이면서 [[조선 인종|인종]]의 후궁 [[숙빈 윤씨]]의 친정아버지이다. 2002년에 발견된 서손녀 미이라의 유품을 통해 [[문정왕후]]의 남동생이 아닌 오빠로 확인되었다. [[경기도]] 출신.
 
[[1524년]](중종 19년) 세자익위사 세마, [[1530년]](중종 25년) 부사과 등을 지내고 [[돈녕부]][[도정]]에 이르렀다. [[1546년]](명종 1) [[위사공신|위사]][[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는 윤원형과 윤원로와 갈등하지 않아 천수를 누렸으나 [[1546년]]부터 윤원형이 [[윤원로]]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했다. 그는 형제들 중 장수하여 선조 즉위를 보고 사망했다. [[2002년]] [[9월]] 그의 일가 묘역에서 그의 출산 중 사망한 그의 서손녀가 임산부 미라로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ref>[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89183 무덤 밖으로 걸어나온 16세기 양반가 여인] 시사저널 2003.11.11.</ref> 해당 미라는 그의 일찍 죽은 아들 윤소의 서녀였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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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둘째 오빠로 대윤과 소윤의 친척이었는데, 소윤에 더 가까웠다. 윤임 일파를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다. 윤원형과 [[윤임]]은 친척이었는데, 윤원형의 5대조 [[윤번]]의 딸이 [[조선 세조|세조]]비 [[정희왕후]]로, 정희왕후의 남동생 윤사흔의 4대손이었다. [[윤임]]은 [[윤번]]의 차남 [[윤사윤]]의 후손으로 윤원량과 [[윤원형]], [[윤원로]]의 아버지 [[윤지임 (1475년)|윤지임]]과는 8촌간이었다. 윤원량은 [[윤번]]의 셋째 아들 [[윤사흔]]의 고손자였다.
 
그의 딸 [[숙빈 윤씨]](淑嬪 尹氏)는 [[조선 인종|인종]]의 후궁이 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donga.com/fbin/searchview?n=200211060291 donga.com[뉴스:기사검색&#93;<!-- 봇이 붙인 제목 -->]</ref> 여동생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는 [[조선 중종|중종]]의 계비가 되었으므로 [[조선 중종|중종]]은 처남매부간이면서 겹사돈이기도 하다. 그의 초기 생애는 미상이다.
 
=== 초기관료 활동생활 ===
그의 초기 생애는 미상이다.
[[1524년]](중종 29년) 세자익위사 세마(洗馬)가 되자 양사에서 동궁에서 시위(侍衛)를 맡기기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지만 [[중종]]이 이를 듣지 않았다.<ref>중종실록 50권, 중종 19년 2월 23일 무오 1번째기사 1524년 명 가정(嘉靖) 3년 대간이 이함·유홍의 일, 동궁의 관속, 김의석 형제, 금주에 관해 계하다</ref> 그뒤 장령(掌令) 유윤덕(柳閏德)·헌납(獻納) 최극성(崔克成) 등이 그를 거듭 공격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 초기 활동 ===
[[1524년]] 세자익위사 세마(洗馬)가 되자 양사에서 동궁에서 시위(侍衛)를 맡기기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지만 [[중종]]이 이를 듣지 않았다.<ref>중종실록 50권, 중종 19년 2월 23일 무오 1번째기사 1524년 명 가정(嘉靖) 3년 대간이 이함·유홍의 일, 동궁의 관속, 김의석 형제, 금주에 관해 계하다</ref> 그뒤 장령(掌令) 유윤덕(柳閏德)·헌납(獻納) 최극성(崔克成) 등이 그를 거듭 공격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1530년]] 부사과(副司果)로 재직 중, 대간으로부터 마땅히 해임되어야 될 군직인데도 높은 품계를 받고, 녹봉을 받은 사람의 하나라며 파직 탄핵을 당했으나 [[중종]]이 그들이 어떻게 자신이 해임될 줄을 알았겠느냐며 파직을 거부하였다.<ref>중종실록 68권, 중종 25년 7월 15일 임인 1번째기사 1530년 명 가정(嘉靖) 9년 간원이 남걸·황사경 등 11인의 군직인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다</ref> [[1536년]] 그의 딸이 세자의 후궁인 [[양제]]의 후보자로 간택되자 [[문정왕후]]의 근친이라는 이유로 사간 권기(權祺)가 문제제기를 하였으나 중종이 듣지 않았다.<ref>중종실록 81권, 중종 31년 2월 6일 신묘 1번째기사 1536년 명 가정(嘉靖) 15년 궁시 제작·양제 간택·유생과 시험의 폐단·견항진 공사 등에 대한 구언</ref> 이는 [[김안로]]가 자신의 외손녀나 손녀를 세자의 후궁으로 들이고자 사주했다는 설도 있다.<ref>중종실록 87권, 중종 33년 2월 20일 갑자 6번째기사 1538년 명 가정(嘉靖) 17년 박홍린을 흥양현에 귀양보내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