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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광수 창씨개명.jpg|썸네일|320px|right|1940년 [[2월 20일]] [[매일신보]]. 〈창씨와 나〉]]
{{인용문2|'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그가 창씨개명을 단행하다 다시 그의 집 앞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와서 돌과 인분, 쓰레기 등을 던졌다. 하루는 [[벽초 홍명희]]가 [[한용운]]을 찾아가 “최린, 이광수가 창씨개명을 했답니다. 이런 ×자식들 때문에 민족적 악영향이 클 것이니 청년들을 어떻게 지도한단 말입니까”라며 흥분했다.<ref name="gaedok">[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72270432 만해(萬海)와 벽초(碧初)] 조선일보 2004.07.22</ref> 그러자 [[한용운]]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 자들을 과대평가하고 있소. 만약 말을 할 줄 아는 개가 있다면 당신에게 크게 항의할 것이요.<ref name="gaedok"/>”창씨 사건 뒤로 [[한용운]]은 그와 절교하여 한번도 만나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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