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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ecIndep31.jpg|230px|섬네일|3·1운동 기념비]]
 
일제의 탄압에 핍박받던 한국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전개된 세계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조류에 편승하여 [[1919년]] 대규모 민족해방운동인 [[3·1 운동]]을 전개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발표는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을 고무시켰고, 이는 [[파리 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을 파견하는 것과, [[2·8 독립문화통치는 선언]]과가혹한 [[3·1식민 운동]]으로통치를 이어진다은폐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였지만, 경찰의 수와 장비는 오히려 증강되고,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기위한 '고등경찰제'를 도입하여, 일제의 행태는 더욱 악랄해졌다.
 
[[3·1 운동]]이 발발하자 일제는 무단통치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친일파를 육성하기 위한, 이른바 '문화통치'을 시행했다. 이 문화통치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였지만, 경찰의 수와 장비는 오히려 증강되고,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기위한 '고등경찰제'를 도입하여, 일제의 행태는 더욱 악랄해졌다.
 
==== 1920년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