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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5년(1916년), 마부치 야스에게 입적되고 다시 중국에 건너가 상해 북쪽 사천로의 일본인 병원에 취직한다. 이 때부터 중국풍 이름인 잇키(一輝)를 자칭했다. 1919년(다이쇼 8년, 민국 8년), 병원에 출입하던 [[시미즈 코노스케]], [[이와타 후미오]]에게서 일화상애회(日華相愛会)의 자문을 요청받았다. 1920년(민국 9년) 8월, 상해를 방문한 [[오카와 슈메이]], [[미츠카와 카메타로]]에게 귀국을 요청받고 12월 31일 시미즈와 함께 귀국했다.
 
다이쇼 10년(1921년) 1월 4일부터 [[유존사]]의 핵심 존재가 되어 국가개조운동에 관여하게 된다. 다이쇼 12년(1923년) 유존사가 해산당했다. 키타는 『[[일본개조법안대강]]』을 일부 복자로 발간했다. 이것은발간하여, 의회를 통한 개조에 한계를한계가 느끼고있으니 군사혁명, 즉 [[쿠데타]]에 의한 개조를 주장했다. 이것은 [[2·26 사건]]의 주모자인 청년장교 [[무라나카 타카지]], [[이소베 아사이치]], [[쿠리하라 야스히데]], [[나카하시 모토아키]]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동 문건에서 사유재산, 사유토지에 제한을 두어 자본의 집중을 방지하고, [[화족]] 같은 특권계급이 천황과 국민을 가로막는 울타리라고 지적, 그 철거를 주장했다.
 
다이쇼 15년(1926년), [[야스다 공제생명회사 내분사건]]이 일어났다. 키타의 앞잡이였던 시미즈 코노스케가 피로 물든 옷을 입고 야스다 생명에 나타나 회사를 위협했다. 같은 해 키타는 15은행이 재산을 사리사욕에 남용, 경영이 난맥을 당하고 있다고 공격하는 [[찌라시]]를 제작해 각 방면에 뿌렸다. 키타의 영향하에 있는 군인, 우익의 테러를 우려한 [[자이바쓰|재벌]]들은 키타에게 정보료 명목으로 뇌물을 보냈다. 이 자금으로 키타는 “당당한 저택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보내고, 처자 3인 외에 하녀 3명, 자동차 운전수 1명 등을 먹여살렸다. 같은 해 [[궁내성 괴문서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이듬해인 쇼와 2년(1927년)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