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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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과 세자 책봉 ====
[[파일:Korea-Yeongjo-King of Joseon-c1.jpg|섬네일|right|150px|부왕 [[조선 영조|영조]]]]
사도세자 이선은 [[1735년]] [[2월 13일]](음력 1월 21일
[[조선 영조|영조]]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그는 후궁 출신 서자였다.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조선 영조|영조]]의 정비 [[정성왕후]]의 양자가 되고,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곁을 떠나 내시와 나인들 손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거처는 부왕 [[조선 영조|영조]]를 적대시하던 왕대비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가 거처하던 저승전(儲承殿) 이었고, 저승전(儲承殿) 옆에는 지난 [[희빈 장씨]]가 거주하던 취선당(就善堂)이 있었다. 세자는 그들로부터 [[조선 경종|경종]] 독살설과 [[노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접하게 된다. 이때 저승전의 나인들 중 한상궁과 이상궁이 주로 세자를 대하였는데, 이들은 각각 자신들의 역할을 분담하여 세자를 훈육하였다.{{출처|날짜=201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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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자 시절 ====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다.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ref name="daum1">[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8j3350a 장헌세자 - Daum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ref> 10세 때 [[참봉]] [[홍봉한]]의 딸 홍씨를 간택하여 혼인하였다. 딸이 세자와 가례를 올린 뒤 [[홍봉한]]은 과거에 급제하고, [[홍봉한]]은 과거 급제 후 10년도 안돼 종2품으로 승진하여 [[광주]][[부윤]]이 되는 등의 출세가도를 달렸다.
부왕 [[조선 영조|영조]]는 자신이 무수리의 자식이라 갖게 된 한이 있어 아들 사도세자에게서는 무수리의 자식스러운 모습을 결코 보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는게 세자의 도리라고 해서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이상궁과 한상궁이 칼과 칼집을 가지고 와 전쟁놀이도 하였다. 나이 어린 세자가 노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사도세자는 자기 어머니인 영빈 이씨한테 전쟁놀이를 하였음에도 소학과 학문을 하였다고 거짓을 고하는등 날이가면 갈수록 거짓이 심해졌다. 이를 안 영조는 매우 분노하였으며 몸소 저승전까지 가서 사도세자에게 꾸중을 했다고 한다. 영조는 이상궁과 한상궁을 추궁하는것을 마치지 않고 호된 형벌을 하여 궐 밖으로 내치라는 어명이 떨어졌고 결국 이상궁과 한상궁은 형벌을 받다 죽었다.
날이 갈수록 청심환을 먹지 않고서는 영조 앞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였으며, 그 상태에서 영조가 무슨 말을 하려고만 해도 곧바로 기절해버릴 정도 였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하면 이는 공포증과 광증(狂症)으로 표출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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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가 되는 [[1749년]](영조 25년) 승명대리(承命代理)로 [[대리청정]](廳政)을 시작했다. 영조는 세자를 심히 못마땅히 여기면서도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까닭으로 세자에게서 대리청정을 거두지 않았다. 영조로부터 칭찬이나 격려는 커녕 호통과 때로는 폭설을 들으면서도 세자는 세자된 책임으로서 대리청정을 수행하였다.
[[1750년]] [[혜경궁 홍씨]]로부터 첫 아들인 [[의소세손|세손 정]](琔)이 태어난다. 세손 정의 출생으로 갈등이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영조는 남자가 귀해진 왕실에서 그것도 늘그막에 본 귀한 손자라 퍽 이뻐하였고 사도세자는 아들인 세손을 방패 삼아 영조의 불호령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라 전해진다. 그러나 세손이 유아임에도 앓았고 영조는 세자가 세손을 제대로 보양하지 못 함이라며 다시 세자에게 칼날을 세웠고 둘 사이는 다시 어긋나기 시작했다. 결국 세손 정은 생후 3년만에 요절하였고, 세자는 부왕과 갈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1752년]] 둘째 아들 [[조선 정조|산]]을 출산한다. 영조가 귀애하던 화평옹주의 상 중에 태어난 터라 영조는
=== 대리청정 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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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약내를 맡고는 이런 저런 흠을 잡아 면박을 주며 물리치자 세자는 밖에 우두커니 서서 미동도 하지 아니했다. 이에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 것을 종용하자 이를 거절하고 이것으로 둘째 세손의 탄생으로 인한 화해의 기미는 날라가고 만다.<ref name="daum1"/> 세자는 영조가 약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므로 약을 권할 면목조차 없다고 했으나, 영조는 그런 꾸짖음 하나 못 받느냐며 몹시 기분이 상했다.<ref name="daum1"/>{{출처|날짜=2014-02-26}}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환곡에 대하여 덜어내고 더 받는 등 형편에 따라 세금을 조정하여 백성들의 짐을 경감시켜 주었고, 가난한 평민들을 괴롭히는 대동(大同)·군포(軍布)의 대전(代錢)·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ref name="daum1"/> 이런 선정으로 [[충청남도]] [[아산시|아산군]] [[온양시|온양]]의 온양 행궁 때는 백성들로부터 열의와 같은 환호를
또한 [[소론]] 출신 재상 [[조현명]], [[이종성]] 등은 그를 정치적으로 후원하였고, [[노론]] 중에서도 원칙론자인 [[유척기]], [[이천보]] 등이 그를 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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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etter of Crown Prince Sado of Joseon 3.jpg|섬네일|right|170px|장조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한 편지 사도세자는“내 나이가 금년 15살 봄을 넘긴 지가 오래 됐으나 아직 한 번도 명릉(숙종의 능)에 나아가서 참배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적어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을 표현하기도 했다.<ref name="cho01">[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15/2007061500948.html “울화증 약 몰래 보내주세요…”] 조선일보 2007.06.15</ref> 그는 자신의 후견세력이자 신뢰할 곳으로 처가인 [[홍봉한]] 가문을 선택하였다.
{{인용문2|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br /><br />(1753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ref name="dyletter">[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15/2007061500165.html `사도세자 심경 토로' 편지 발견] 조선일보 2007년 06월 15일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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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광무 (연호)|광무]] 3년) [[9월 1일]] 고종 황제는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고 [[11월 13일]] 묘호는 장종(莊宗)이라고 하였다가, [[1901년]] [[10월 17일]] 광무 5년 다시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라고 하였다.<ref>고종실록, 1901년, 10월 17일 45책 41권 67장 A면</ref> 능호는 융릉(隆陵)이다. [[무속신앙|무속]]에서도 장조를 왕자신(뒤주대감)으로 모신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던 정조는 사후 생부의 곁에 묻히게 되어 융건릉이 조성된다. 부인 혜경궁 홍씨가 남긴 저서 [[한중록]]
== 저서 ==
* 《능허관만고 (凌虛關漫稿)》
* 《어제장헌대왕지문》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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