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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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과 세자 책봉 ====
[[파일:Korea-Yeongjo-King of Joseon-c1.jpg|섬네일|right|150px|부왕 [[조선 영조|영조]]]]
사도세자 이선은 [[1735년]] [[2월 13일]](음력 1월 21일) [[조선 영조|영조]]의 서장자(차남) [[영빈 이씨]](暎嬪 李氏)의 소생으로소생인 [[조선 영조|영조]]의 서장자(차남)로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태어났다. 이복 형인 [[조선 진종|효장세자]]가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그는 생후 1년만에 원자(元子) 정호를 받았다. 그가 태어날 때 부왕 [[조선 영조|영조]]는 친히 어머니 [[영빈 이씨|영빈]]의 출산 장면을 지켜보았다.
 
[[조선 영조|영조]]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그는 후궁 출신 서자였다.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조선 영조|영조]]의 정비 [[정성왕후]]의 양자가 되고,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곁을 떠나 내시와 나인들 손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거처는 부왕 [[조선 영조|영조]]를 적대시하던 왕대비 [[선의왕후 (조선)|선의왕후]]가 거처하던 저승전(儲承殿) 이었고, 저승전(儲承殿) 옆에는 지난 [[희빈 장씨]]가 거주하던 취선당(就善堂)이 있었다. 세자는 그들로부터 [[조선 경종|경종]] 독살설과 [[노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접하게 된다. 이때 저승전의 나인들 중 한상궁과 이상궁이 주로 세자를 대하였는데, 이들은 각각 자신들의 역할을 분담하여 세자를 훈육하였다.{{출처|날짜=201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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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자 시절 ====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다.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ref name="daum1">[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8j3350a 장헌세자 - Daum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ref> 10세 때 [[참봉]] [[홍봉한]]의 딸 홍씨를 간택하여 혼인하였다. 딸이 세자와 가례를 올린 뒤 [[홍봉한]]은 과거에 급제하고, [[홍봉한]]은 과거 급제 후 10년도 안돼 종2품으로 승진하여 [[광주]][[부윤]]이 되는 등의 출세가도를 달렸다.
부왕 [[조선 영조|영조]]는 자신이 무수리의 자식이라 갖게 된 한이 있어 아들 사도세자에게서는 무수리의 자식스러운 모습을 결코 보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는게 세자의 도리라고 해서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이상궁과 한상궁이 칼과 칼집을 가지고 와 전쟁놀이도 하였다. 나이 어린 세자가 노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사도세자는 자기 어머니인 영빈 이씨한테 전쟁놀이를 하였음에도 소학과 학문을 하였다고 거짓을 고하는등 날이가면 갈수록 거짓이 심해졌다. 이를 안 영조는 매우 분노하였으며 몸소 저승전까지 가서 사도세자에게 꾸중을 했다고 한다. 영조는 이상궁과 한상궁을 추궁하는것을 마치지 않고 호된 형벌을 하여 궐 밖으로 내치라는 어명이 떨어졌고 결국 이상궁과 한상궁은 형벌을 받다 죽었다. 이일로이 일로 인해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극심한 불신과 가혹한 꾸중을 들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그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고 하고 영조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으며 영조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청심환을 먹지 않고서는 영조 앞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였으며, 그 상태에서 영조가 무슨 말을 하려고만 해도 곧바로 기절해버릴 정도 였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하면 이는 공포증과 광증(狂症)으로 표출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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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가 되는 [[1749년]](영조 25년) 승명대리(承命代理)로 [[대리청정]](廳政)을 시작했다. 영조는 세자를 심히 못마땅히 여기면서도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까닭으로 세자에게서 대리청정을 거두지 않았다. 영조로부터 칭찬이나 격려는 커녕 호통과 때로는 폭설을 들으면서도 세자는 세자된 책임으로서 대리청정을 수행하였다.
 
[[1750년]] [[혜경궁 홍씨]]로부터 첫 아들인 [[의소세손|세손 정]](琔)이 태어난다. 세손 정의 출생으로 갈등이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영조는 남자가 귀해진 왕실에서 그것도 늘그막에 본 귀한 손자라 퍽 이뻐하였고 사도세자는 아들인 세손을 방패 삼아 영조의 불호령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라 전해진다. 그러나 세손이 유아임에도 앓았고 영조는 세자가 세손을 제대로 보양하지 못 함이라며 다시 세자에게 칼날을 세웠고 둘 사이는 다시 어긋나기 시작했다. 결국 세손 정은 생후 3년만에 요절하였고, 세자는 부왕과 갈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1752년]] 둘째 아들 [[조선 정조|산]]을 출산한다. 영조가 귀애하던 화평옹주의 상 중에 태어난 터라 영조는 한동안 아기를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의 출산을 도운 영빈이씨에게도영빈 이씨에게도 책망 할 정도정도로 아기를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이에 세자는 나 하나도 버거운데 아이는 어찌하냐어찌하나 한탄했다고 한다. 이 아이가 후일의 [[조선 정조|정조]]가 된다.
 
=== 대리청정 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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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약내를 맡고는 이런 저런 흠을 잡아 면박을 주며 물리치자 세자는 밖에 우두커니 서서 미동도 하지 아니했다. 이에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 것을 종용하자 이를 거절하고 이것으로 둘째 세손의 탄생으로 인한 화해의 기미는 날라가고 만다.<ref name="daum1"/> 세자는 영조가 약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므로 약을 권할 면목조차 없다고 했으나, 영조는 그런 꾸짖음 하나 못 받느냐며 몹시 기분이 상했다.<ref name="daum1"/>{{출처|날짜=2014-02-26}}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환곡에 대하여 덜어내고 더 받는 등 형편에 따라 세금을 조정하여 백성들의 짐을 경감시켜 주었고, 가난한 평민들을 괴롭히는 대동(大同)·군포(軍布)의 대전(代錢)·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ref name="daum1"/> 이런 선정으로 [[충청남도]] [[아산시|아산군]] [[온양시|온양]]의 온양 행궁 때는 백성들로부터 열의와 같은 환호를 받았으며 이때는 도성에 있는 부왕 영조를 그리워하는 편지서찰을 보내기도 했다받았다. <ref>후에 [[이덕일]]은 이런 점을 들어 그가 정신병을 앓았다는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ref>
 
또한 [[소론]] 출신 재상 [[조현명]], [[이종성]] 등은 그를 정치적으로 후원하였고, [[노론]] 중에서도 원칙론자인 [[유척기]], [[이천보]] 등이 그를 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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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etter of Crown Prince Sado of Joseon 3.jpg|섬네일|right|170px|장조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한 편지 사도세자는“내 나이가 금년 15살 봄을 넘긴 지가 오래 됐으나 아직 한 번도 명릉(숙종의 능)에 나아가서 참배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적어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을 표현하기도 했다.<ref name="cho01">[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15/2007061500948.html “울화증 약 몰래 보내주세요…”] 조선일보 2007.06.15</ref> 그는 자신의 후견세력이자 신뢰할 곳으로 처가인 [[홍봉한]] 가문을 선택하였다.
 
{{인용문2|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br /><br />(1753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ref name="dyletter">[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15/2007061500165.html `사도세자 심경 토로' 편지 발견] 조선일보 2007년 06월 15일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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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광무 (연호)|광무]] 3년) [[9월 1일]] 고종 황제는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고 [[11월 13일]] 묘호는 장종(莊宗)이라고 하였다가, [[1901년]] [[10월 17일]] 광무 5년 다시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라고 하였다.<ref>고종실록, 1901년, 10월 17일 45책 41권 67장 A면</ref> 능호는 융릉(隆陵)이다. [[무속신앙|무속]]에서도 장조를 왕자신(뒤주대감)으로 모신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던 정조는 사후 생부의 곁에 묻히게 되어 융건릉이 조성된다. 부인 혜경궁 홍씨가 남긴 저서 [[한중록]]뿐만아니라 뿐만 아니라 실록,사도세자묘지문등 수많은 사료에 의하면 그는 우울증과 의대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앓았고 꽤 많은 인명을 살상했던걸로 알려져 있어 그 당시의 대부분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있었다.
 
== 저서 ==
* 《능허관만고 (凌虛關漫稿)》
* 《어제장헌대왕지문》
 
== 논란과 의혹 ==
{{독자 연구 문단|날짜=2016-06-26}}
 
=== 의대증 논란 ===
부인 [[헌경왕후|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그가 옷 입기를 꺼리거나 특정 옷감을 꺼리는 [[의대증]]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9살에 간택되어 궁에 들어와 평생을 산 정신의학적 상식이 전혀 없는 여자가 지어냈다기엔 너무 상세하고 구체적이여서 지어냈다고 볼수는 없다.
 
=== 정신질환 여부 논란 ===
[[헌경왕후|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그가 정신이상 증세와 조울증 증세와 비슷한 증세(광증)를 앓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세자가 18~19살이던 1753~1754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에는 ‘나는 본디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데다가, 지금 또 더위 먹은 가운데 대궐에서 임금(영조)을 뵙고 나오니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에 달하여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더불어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주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썼다.<ref name="cho01"/>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광기를 앓았다는 내용은 나타나지 않고 있고 [[한중록]]에서 묘사한 것처럼 아버지 [[조선 영조|영조]]가 [[화협옹주]], [[화평옹주]]는 총애하고 세자를 구박했다는 기사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 온양행궁에서 그가 백성들을 진휼하고 위문한 점 등을 들어 후대의 역사학자 [[이덕일]]은 그가 정신이상자였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병을 앓았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광기라고 지칭하지 않았을뿐 사도세자에게 병증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ref>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을해) 2번째기사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15394) ·무인년15395)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ref>[[조선 정조|정조]] 본인도 아버지의 병을 스스로 인정하였던 기록<ref>정조 1권, 즉위년(1776 병신 / 청 건륭(乾隆) 41년) 5월 13일(계미) 2번째기사 윤음을 내려 문녀의 죄악을 포고하다 "~대행 대왕께서 인자하게 덮어 주시는 덕이 그처럼 진지하고도 간절하셨기 때문에 선친(先親)의 지난날의 질병이 어쩌면 이로 말미암아 정상으로 회복될 수도 있었는데, 흉계를 빚어 온 지가 이미 오래이고 의구심이 쌓여 온 것이 점차 고치기가 어려웠으니, 그 때에는 단지 문침만 제때에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시선도 제때에 하지 못하였다. 우리 대행 대왕께서는 또한 일찍이 자주 좌우 사람을 보내어 기거(起居)의 안부를 묻게 하고 음식의 다소를 살피게 하셨으니, 이는 곧 양궁(兩宮)께서 자애하시고 효도하시게 될 수 있는 하나의 크고 좋은 기회였는데, 환후가 갈수록 더욱 깊어져서 평복(平復)하게 될 수 없었으니, 어찌하겠는가? ~"</ref> 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사도세자의 광증을 병으로 보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정조가 직접 지은 여귀를 달래는 제문에서도 "모년(某年 1762년(영조38)을 말함) 이전의 의지할 곳 없는 귀신을 제사하여, 환후(患候)가 침독(沈篤)했음을 알게 하노니,"
라며 사도세자에게 죽은 억울한 원혼들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병이 심했음을 알아달라고 하고 있다.
 
=== 반역 기도 의혹 ===
역사가 [[이덕일]]은 그가 [[1762년]](영조 38년) 의문의 [[평안도]]왕환길 무렵 동궁 근처 전각의 지하에 광중을 파고 군기붙이를 숨겼던 것이 [[조선 영조|영조]]에게 발각된 일을 두고 그가 미구에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 영조|영조]]를 은퇴시키려 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 붕당 당쟁설과 관련한 의혹 ===
사도세자가 노론의 반발로 인해 당쟁에 휘말려 죽었다는 당쟁설은 현재 임오화변의 유력한 정설이다. 하지만, 실록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임오화변의 당쟁설에 반하는 기록들이 있었다. 박시백은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 경종, 영조편>에서 당쟁설에 관한 몇 가지의 한계점을 제시하였다.
 
==== 사도세자의 소론 옹호설의 한계점 ====
 
대리청정의 과정에서 사도세자가 소론을 옹호하여, 노론의 반발을 샀고, 이는 임오화변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실록에 기록되어 있던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은 어느 당에 기울이지 않은 매우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영조는 대리청정을 시작한 날부터 세자가 처리한 일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서는 자신이 처리했다.<ref>영조 69권, 25년(1749년) 2월 16일 1번째기사</ref> 본래 대리청정은 왕의 건강이 위독할 때 세자가 대신 정무를 맡는 형식이었는데, 대리청정을 맡길 당시 영조는 비교적 건강한 때였으니 본래의 목적을 위한 대리청정이 아니었다. 대리를 맡길 당시 영조는 세 가지의 이유를 내걸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저궁에게 정사를 밝게 익히도록 하는 것’이었다.<ref>영조 69권, 25년(1749년) 1월 27일 1번째기사</ref> 이는 세자에게 현실의 정치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대리 초기에 왕은 상서에 대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세자에게 현실정치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또한 정통성에 관한 콤플렉스에 시달린 영조가 대리청정을 한 이유는 형식적이었지만 대리를 통해 자신이 왕위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때문에 사도세자의 대리는 형식적으로 하였던 것이지 중요한 정무까지 세자에게 맡기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이므로 세자의 대리영역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자는 부왕의 결정에 반대하지 못하여 대부분의 사안에 대해 '알겠소.', '그럴 수 없소.', ‘대조께 아뢰어 결정하겠소.’라고 하는 등 소론에게 편중된 모습은커녕 사소한 사안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ref>영조 70권, 25년(1749년) 10월 5일 1번째기사 // 영조 70권, 25년(1749년) 11월 29일 1번째기사 // 영조 71권, 26년(1750년) 7월 23일 1번째기사 // 영조 76권, 28년(1752년) 4월 13일 1번째기사</ref> 이에 한번은 조현명이 세자의 대리에 대한 소극적인 모습을 지적하였었다.<ref>영조 69권, 25년(1749년) 2월 20일 1번째 기사</ref> 그러다 왕의 의중을 알게 된 조헌명은 한 달 보름 남짓 후에 세자에게 ‘매사에 부왕의 뜻을 따라야 한다.’라고 하며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했다.<ref>영조 69권, 25년(1749년) 4월 5일 3번째기사</ref>
 
당쟁론에서 세자가 소론을 적극 옹호했다는 주장은 여러 역모사건 이후 잔여 소론 세력들의 처벌을 거절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는데, 이는 영조가 소론이 노론에 의해 완전히 와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대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세자가 이에 대해 “대조께서 반대하시므로 허락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노론의 처벌 요청에 대해 거절하였던 것이다.<ref>영조 78권, 28년(1752년) 10월 29일 1번째 기사</ref> 소론 처벌에 대해 "허락할 수 없다"는 말을 했지만, 독단적인 결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또한, 세자의 보고를 받은 영조는 이들의 상서에 대해 볼 필요도 없을 정도라고 하면서, 세자가 관대하게 대한 것에 대해 가볍게 지적하고서는 상서를 올린 이들을 귀양 보냈다. 이 후에 영조는 이들을 풀어줄 것을 상소한 자들까지도 당파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면서 귀양 보냈다.<ref>영조 78권, 28년(1752년) 10월 29일 2, 4, 5, 7번째기사</ref> 이 후에도 사도세자는 소론 세력들의 처벌에 대해 거절하였던 일 대부분은 ‘대조의 뜻이므로 따를 수 없다.’라고 답하였었다. 이외에 다른 대신들의 처벌과 관련한 논의나 상서에 대해서도 세자는 대조의 뜻이라 하며 거절하였다.<ref>영조 72권, 26년(1750년) 12월 26일 1번째기사 // 영조 74권, 27년(1751년) 12월 22일 1번째기사 // 영조 77권, 28년(1752년) 6월 9일 1번째기사 // 영조 78권, 28년(1752년) 12월 23일 3번째기사 // 영조 86권, 31년(1755년) 10월 29일 1번째기사 // 영조 91권, 34년(1758년) 1월 10일 3번째기사</ref> 이러한 기록들은 세자가 부왕의 뜻을 따랐고 자신의 의견을 최대한 자제했다고 하는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도세자는 탕평을 지향하였는데, 격한 상서를 올린 이에게 당습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영조가 지향한 탕평의 뜻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었다.<ref>영조 74권, 27년(1751년) 12월 24일 2번째기사</ref>
 
대리청정에서 대부분의 사안들은 영조의 결정에 따랐고, 영조가 소론세력의 처벌을 저지하여 세자가 이를 지지했다는 기록들은 영조가 친노론이었고, 사도세자가 친소론이었다는 당쟁설의 주장에 한계점을 가져다 주는 셈이다.
 
==== 영조가 친노론이었다는 점의 한계점 ====
 
또한, 당쟁설에 대한 한계점으로는 영조가 당쟁으로 인해 아들을 없앴을 만큼 친 노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노론세력이 아무리 세자를 모함했다고 해도 영조는 노론의 모함에 휘말려 자신의 아들을 죽일 만큼 판단력이 부족했던 임금은 아니었다.
 
영조는 매우 냉정하고, 치밀했던 성격으로 자신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이용하여, 신하들을 압박하고는 하였다. 영조는 숙종 이후 떨어진 왕권을 강화시켜 대부분의 기득권층이 손대지 않던 민생의 안정에 힘써 조선 후기의 부흥을 불러왔다. 판단을 하는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날카로웠고, 정국을 주도하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던 임금이었다.
 
또한, 영조는 탕평정치를 지향했던 임금이었다. 물론 후기에는 노론이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이는 단지 영조가 친 노론이었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었다. 경종을 죽인 것은 노론과 영조의 음모라고 주장하며, 소론(그중 준론이 가장 심하였다.) 세력들은 이인좌의 난을 일으키고, 각종 역모계획을 꾸몄다가 전부 실패하면서 대부분의 소론 준론들은 와해하게 된다. 이후의 소론은 최소한의 완론 세력들만 살아남게 되었기 때문에 영조의 탕평 정치는 노론 위주의 정치로 귀결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역모사건 이후에도 영조는 소론에 대한 강경한 처벌이나 노론 중심의 정치를 저지하였다.<ref>영조 76권, 28년(1752년) 5월 27일 2번째기사 (오찬은 정언에 제수된 이후 소론의 징토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영조의 미움을 사 쫓겨났었다.)</ref> 자신과 노론을 신원하는 책인 <천의소감>을 편찬할 때 영조는 서론에서 소론이 지나치게 폄하되는 기록에 대해 '''“이 책이 당론에 대해 지어졌는가?”'''라고 하며, 분개하여 노론의 신하들로부터 당론을 하지 않겠다는 소를 받아내고, 붕당정치에 대해 강한 경고를 날리기도 했었다.<ref>영조 85권, 31년(1755년) 9월 21일 3, 4, 5, 6번째 기사 및 22일 1번째 기사 // 이 무렵에는 소론 이종성을 탄핵하는 상서를 쓴 홍준해를 귀양 보냈다.</ref> 다만, 노론 위주의 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외척세력을 끌어들인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그 외척 중 대표적인 인물이 홍봉한으로 홍봉한은 노론이기도 했지만, 영조에 의해 실세로 떠오른 인물이었고<ref>홍봉한의 딸이 세자빈에 책봉될 때까지만 해도 홍봉한은 정 9품의 벼슬인 세마에 불과했었다. / 영조 59권, 20년(1744년) 1월 9일 1번째기사</ref>, 때문에 홍봉한은 영조의 뜻을 앞세웠다. 영조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이들을 바탕으로 왕권 중심의 정치를 확립한다. 강력한 영조의 왕권은 죽기 몇 년 전까지 계속되었고, 영조는 탕평정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사도세자가 죽고 난 후에는 한유라는 자가 홍봉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중에서 ‘일물(뒤주를 일컫는 표현)을 바친 죄’를 다스리라는 부분에서 영조는 ‘비록 홍봉한이 바쳤다고 해도 그 물건을 쓴 사람은 내가 아니더냐?’라고 하였다.<ref>영조 117권, 47년(1771년) 8월 7일 4번째기사</ref>
 
==== 결론 ====
 
사도세자가 친소론으로 친노론이었던 영조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고, 노론이 세자를 탄핵하거나 모함하여 영조를 분노케 하였으며, 때문에 세자는 당쟁에 휘말리게 되어 죽게 되었다는 당쟁설에 대해 사도세자와 관련한 실록의 기록들을 살펴봤을 때 당쟁설과는 반대되는 기록들이 더 많았다. 영조의 뜻에 따를 뿐이었던 대리청정 과정에서 사도세자는 소론을 옹호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노론이 대부분이었던 조정의 신하들은 세자를 모함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관서행이나 각종 잘못, 비행들을 영조가 직접 알게 되기 전까지 상소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사도세자가 죽게 된 이유로 유력하다는 당쟁설은 그 근거가 빈약하다고 할 수 있다.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