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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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으로 집권한 두 번째 군주였다. 그러나 사적인 욕심이나 원한으로 반정을 일으킨 [[세조 찬위]], [[인조반정]]과는 다른 각도에서 평가되나, 전반에는 공신 세력의 전횡에, 후반에는 외척 세력의 전횡에 휘둘렸다. 하지만, [[김안로]]나 [[조광조]]의 숙청 때 [[중종]]의 모습은 사관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라고 하거나, '이때 양연이 대사헌으로 이 의논(김안로의 처벌)을 먼저 주장한 것은 왕의 밀지(密旨)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라고 했듯이 단순히 신권에 의해 휘둘린 왕은 아니었다. 재위 중반에 [[조광조]]등의 사림을 일시에 기용하였으나 공훈삭제와 관련한 공신세력들의 반발과 자신의 왕권의 위협에 대해 우려하여 사림 세력들을 기습적으로 숙청한다. 이 후에는 남곤이 정국을 주도하고, 남곤 사후에는 김안로가 주도하지만, [[김안로]]의 지나친 권력쟁투와 횡포로 인해 위협을 느껴 [[조광조]]와 마찬가지로 김안로를 기습적으로 제거한다. 이후에는 외척에게 정사를 맡긴다. 이는 후일 [[대윤]], [[소윤]]간의 정쟁의 원인이 된다.
 
== 생애 ==
아 그럼 오늘 하루도 잘 안 된다, 이렇게. 이 때문에 이번 주 내로, . . 하지만, 이 가운데, 그의 과거 발언이 새삼. 이 때문에 이번 주 내로, 아아아
=== 생애 초반 ===
1494년에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해졌다가 1506년에 [[음력 9월 2일]]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 [[박원종]](朴元宗) · [[유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조선의 새 임금을 받는 등 다양한 반응을 나타냈다, . , . , . 추대되었다. 당시 진성대군은 자신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온 반정군을 적으로 여겼을 정도로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중종은 [[조선 성종|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성은 [[이씨|이(李)]], 본명은 이역(李懌),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다. 이복 형인 [[조선 연산군|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정현왕후]]를 친어머니로 여기면서 자라다가, 우연한 기회에 [[폐비 윤씨]]의 일을 알게 되었다. 이후[[정현왕후]]와의 관계는 소원해졌지만 ,[[조선 연산군|연산군]]은 어린 이복동생에게는 친절하였다. 그 뒤 진성대군은 [[신수근]]의 딸과 가례를 올린다. [[신수근]]의 아버지는 [[영의정]] [[신승선]]으로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정비 [[거창군 부인]]신씨의 친정아버지이기도 했다. 친가로는 이복 형제였지만, 처가로는 처고모부와 조카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1494년에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해졌다가 1506년에 [[음력 9월 2일]]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 [[박원종]](朴元宗) · [[유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조선의 새 임금을 받는 등 다양한 반응을 나타냈다, . , . ,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진성대군은 자신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온 반정군을 적으로 여겼을 정도로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반정군에 의해 추대 제의를 여러 번 받을 때부터 그는 신하가 임금을 택한다(澤君)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공신들의 세력은 막강하였고 [[중종 반정]]으로 추대된 이후 그는 이를 타개할 대안을 마련하는데 절치부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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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 및 능묘 ===
38년 2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위에 머물러 있었던 중종은 정국이 혼란을 거듭하는 바람에 이렇다 할 만한 업적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1543년 3월부터 [[대리청정]]을 맡긴 [[조선 인종|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준 다음날인 1544년 11월 29일 ([[음력 11월 15일]]), 57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강남구)|삼성동]]에 있는 [[선정릉|정릉]](靖陵)으로 능원에 중종 혼자만 묻혀 있다.
 
원래 왕릉을 조성할 때는 조선 최고의 [[풍수지리]] 학자 들로부터 최고의 명당자리를 찿아 능을 조성하는데, 정릉은 조선의 왕릉 중에서 풍수지리가 좋지 않은 자리라는 얘기가 있다. 그 근거로, 비가 올때 물이 능의 가운데 부분까지 침수가 되는데, 이러한 경우는 조선의 왕릉 중에서 정릉이 유일하다. 특히 장맛비가 한차례 지나가면 정릉의 능선은 완전히 침수가 되어 그 물이 제실까지 들어가는 등의 피해가 생기자 1562년 원래 [[경기도]] [[고양시]]에 있던 정릉을 현재 성종이 안장되어 있는 [[선릉]] 주변으로 이장하여 지금에 이른다.
 
== 중종에 대한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