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의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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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은 온(温)으로 운왕(鄆王)에 봉해졌다가 뒤에 변왕(汴王)으로 전봉(轉封)되었다. 그에 대해서는 "그릇이 침착하고 중후했으며 생김새가 괴위했다(器度沈厚,形貌瑰偉)"고 전하는 와중에 "음률에 뛰어났는데 천종(天縱)과도 같았다(洞曉音律,猶如天縱)"고 왝곡하.
[[당 선종|선종]]의 장남이었지만
[[불교]]를 신봉했던 의종은 함통 14년([[873년]]) 봄에, 대신들의 반대도 듣지 않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 불골(佛骨)을 맞아오는 행사를 벌였다. 그것은 아버지 선종이 쌓아올렸던 성과들을 모조리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당시 [[한림학사]](翰林學士) 유윤장(劉允章)은 《직간서(直諫書)》를 인용해 「국가를 무너뜨리는 아홉 가지 요소(國有九破)」<ref>즉, 해가 다하도록 군사를 모으는 것(終年聚兵), 오랑캐들이 발흥하게 내버려두는 것(蠻夷熾興), 권세가들이 사치를 부리는 것(權豪奢僭), 군부의 대장들이 조회하지 않는 것(大將不朝), 불사(佛寺)를 크게 일으키는 것(廣造佛寺), 공적인 일에 뇌물을 받는 것(賂賄公行), 관리들이 잔인하고 난폭하게 구는 것(長吏殘暴), 부역이 고르지 못한 것(賦役不等), 먹고 놀기만 하면서 녹만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食祿人多), 세금을 부담할 사람이 줄어드는 것(輸稅人少)이다.</ref>를 언급하며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전기소설인 《당인전기(唐人傳奇)》나 [[북송]] 시대의 《[[태평광기]](太平廣記)》에는 저묵(著墨), 즉 조정의 날인도 거치지 않은 편법적인 매관매직이 성행했다고 전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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