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쿠 슈스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25번째 줄:
1910년(메이지 43년) 6월, [[고토쿠 사건|대역사건]] 혐의로 체포된다. 당시 슈스이는 정부 [[간노 스가]]와 함께 온천숙 중이었다. 옥중에서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를 부정하는 『기독말살론』을 탈고했다. 이 책에서 예수는 천황의 은유였다고도 한다. 그 내용은 [[신지학 협회]]의 [[애니 베산트]]의 기독교 이론과 일치하는 부분이 커서 베산트의 영향이 지적된다. 이것이 유고가 되었다.<ref>小森健太郎 [http://ci.nii.ac.jp/naid/120005736095 幸徳秋水『基督抹殺論』とアニー・ベサントの〈世界教師〉論] 文学・芸術・文化 : 近畿大学文芸学部論集27(1), 116-110, 2015-09 近畿大学文芸学部</ref>
 
이듬해 유죄, [[사형]]을 판결받고, 다른 사형수들과 함께 1월 24일 저형되었다. 이러한 당국 대응은 이미 국내외 지식인층의 비판이 있었다. 당국은 [[사회주의자]]의 일망타진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대역사건 발각을 기회로 삼아 사건 관여 정도가 얕고 [[대역죄]]에 해당하지 않는 슈스이 등까지 죄를 [[날조]]해 처형했다. 사형수 12명 중 실제로 황족 암살을 음모했던 것은 간노 스가, [[니이무라 타다오다다오]], [[미야시타 타키치다키치]], [[후루카와 리키사쿠]] 4명 뿐이었다. 슈스이는 그 중 칸노와 불륜 관계로 평민사 사내에서 동거 중이었기에 암살 계획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간노가 주모자였다는 검찰 주장에도 상당히 무리가 있었다.
 
슈스이는 감옥에 면회 온 처 치요코의 도시락에 손도 대지 않을 정도로 부부 관계가 냉각되어 있었지만 죽고 나서 묘소는 고향 고치현 시만토시의 절간에 치요코의 무덤 곁에 안장되었다. 비문은 [[고이즈미 사쿠타로]]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