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쿠 슈스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32번째 줄:
[[도쿠토미 겐지로]]는 슈스이 등의 사형을 막기 위해 형 [[도쿠토미 소호]]를 통해 [[가쓰라 다로]] 총리에게 탄원했지만 소용 없었다. 1911년(메이지 44년) 1월 슈스이 등이 처형되자 그 다음달인 2월에 슈스이에 심취해 있던 [[구제 제1고등학교]] 변론부 [[가와카미 조타로]], [[모리토 다쓰오]]의 주최로 「모반론」 강연이 열려 학내에 소동이 일어났다.
 
고토쿠 대역사건은 문학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서,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사건 전후 [[표트르 크로포트킨]]의크로포트킨의 책이나 재판 기록을 입수, 연구해 「시대폐색의 상황」, 「A LETTER FROM PRISON」 등을 집필했다. [[기노시타 모쿠타로]]는 1911년 3월 연극 「이즈미야 염색점」을 집필했다.
 
한편, 슈스이가 법정에서 “지금의 천자는 [[남조 (일본)|남조]]의 천자를 암살하고 [[삼종신기]]를 빼앗아 취한 [[북조 (일본)|북조]]의 천자가 아닌가”라고 발언한 것이 외부에 누설되어 [[난보쿠초 정통론]]이 일어났다.<ref>[[岩城之徳]]「啄木と南北朝正閏論問題」『石川啄木と幸徳秋水事件』([[近藤典彦]]編・吉川弘文館、平成八年)所収。[[滝川政次郎]]「誰も知らない幸徳事件の裏面」『人物往来』昭和三十一年十二月号。また[[池島信平]]編「歴史よもやま話し」、[[花田清輝]]『室町小説集』講談社pp.10-11.も参照。</ref> [[제국의회]] 중의원에서 [[국정교과서]]의 남북조 찬위설을 비난하는 질의서를 제출하고, 2월 4일 의회는 남조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결의를 냈다. 이 결의에 따라 교과서 집필 책임자 [[기타 사다키치]]가 휴직 징계를 당했다. 이후 일본 국정교과서는 『[[대일본사]]』를 근거로 삼종신기를 소유하고 있던 남조를 정통으로 서술하는 내용으로 교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