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405번째 줄:
[[1910년대|1910년대는]] 일제가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의병 활동을 억누르고 국내의 저항 세력을 무단으로 통치한 시기이다.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등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또,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고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한국인을 [[조선 태형령|태형]]에 처하기도 했다.
 
[[토지조사사업]]을 공포하여 식민지 수탈을 시작하였고, [[회사령]]을 공포하여 국내의 자본 세력을 억압하고 일본 자본 세력의 편의를 봐주었다. 이 시기의 한국인 노동자는 극악한 환경과 저임금, 민족적 차별까지 받으며 혹사되었다.일본은 한국에 대해 이천 칠백 킬로미터의 철도를 정비 한.또한 병원도 정비했다.
 
또 [[산림령]], [[광업령]], [[어업령]]을 공포하여 민족자원약탈을 적극적으로 수탈하였다.
415번째 줄:
[[파일:DecIndep31.jpg|230px|섬네일|3·1운동 기념비]]
 
일제의 탄압에 핍박받던 한국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전개된 세계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조류에 편승하여 [[1919년]] 대규모 민족해방운동인 [[3·1 운동]]을 전개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발표는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을 고무시켰고, 이는 [[파리 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을 파견하는 것과,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으로 이어진다.

[[3·1 운동]]이 발발하자 일제는 무단통치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친일파를 육성하기 위한, 이른바 '문화통치'을 시행했다. 이 문화통치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였지만, 경찰의 수와 장비는 오히려 증강되고,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기위한 '고등경찰제'를 도입하여, 일제의 행태는 더욱 악랄해졌다.
 
==== 1920년대 ====
줄 536 ⟶ 538:
* [[한국의 독립운동]]
* [[대한민국의 정부표준영정]]
*<nowiki>[[한국 기원설]]</nowiki>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