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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파일:Rhee Syng-Man in 1956.jpg|섬네일|150px|right|두 번째2번째 남편 [[이승만]] 한국 [[대통령]]]]
 
[[1960년]] 쇠약해진 [[이승만]]을 대신해 여러 정책 문제를 자신이 스스로 처결했다. 얼마 뒤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자진 사퇴한사임한 후 [[하와이 주|하와이]]로 휴양차 출국하자 함께 [[하와이 주|하와이]]로 떠났다. 거주지를 정하지 못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는 [[하와이 주|하와이]] 한국인 교포단체의 유지인 최백렬(崔伯烈), 오중정(吳重政), 윌버트 최 등의 도움으로 한 빌라에 머무르다가 [[이승만]]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하와이 주|하와이]]의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이 사망하고 그 뒤로도 [[하와이 주|하와이]]에서 거주하다가 외무부 장관이 발급한 특별 여권을 소지하고 [[오스트리아]]로 갔다. 이후 친정 동생, 친정 언니의 집을 전전하였다.
 
[[1970년]] [[5월 16일]]에 [[대한민국]] 정부의 배려로 귀국하였다.<ref>월간조선 2001년 3월호</ref> 이후 [[청와대]]가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귀빈으로 초대되었다. 이후 양자 [[이인수 (정치학자)|이인수]] 내외와 함께 살았다. 만년에는 [[국립현충원|동작동 국립묘지국립서울현충원]]의 중단에 묻힌안장된 남편 [[이승만]]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1987년]] [[이승만]]의 전직 비서였던 [[윤치영]]의 구순 기념 논문 봉정식에 참석하였다. [[1990년]] 소피텔 엠배서더 호텔에서 90회 생일 축하연을 했다. 이 때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던 소수 친지들의 방문을 받았다. [[1992년]] [[3월 19일]] 0시경 [[서울특별시]] [[이화장]]에서 향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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