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앱 안드로이드 앱 편집
Asadal (토론 | 기여)
잔글편집 요약 없음
35번째 줄:
 
누르하치가 명나라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하자 수세에 몰린 명은 조선에 소총수 7000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하였고 누르하치는 파병하지 말라고 조선 조정에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광해군]]과 그의 즉위를 도운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신료들은 조선이 국내 수비에 치중하는 것이 후방 수비라는 차원에서 유익하다며 명이 한 요구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으나 [[임진왜란]] 때 명이 원군을 파견해 도운 일을 감안하면 원병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명에 원군을 보내되 싸움이 시작될 때 항복해 조선이 부득이 파병한 실정을 설명하게끔 하였다는 야사가 있으나 이는 파병된 인원의 80%가 전사한 뒤에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 정묘호란 ===
{{한국사}}
{{본문|정묘호란}}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서인]]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이 급선회하였다. 서인은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했고 신료들은 광해군의 중립 대외정책을 기존 친명배금 정책으로 바꾸어 조선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대로 명을 잘 모시어 받들려고 했으며, [[후금]]에서는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해 왔던 홍타이지가 즉위하여 후금의 대조선(對朝鮮) 정책과 태도도 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