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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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및 명칭 ==
=== 역사 ===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교|보성전문학교]]가 처음으로 스포츠 시합에서 만난 것은 [[1923년]] 축구시합이었다는 진위여부가 불확실한 기사가 남아있으며<ref>{{뉴스 인용|제목=2년만에 부푼 고연전 열풍|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10050032920702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10-05&officeId=00032&pageNo=7&printNo=9545&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날짜=1976-10-05|확인날짜=}}</ref>공식적으로는 [[1925년]] [[5월 30일]]에 열린 조선 체육회 주최 ‘제5회 전조선(全朝鮮) 정구대회'에서의 시합을 첫대결로 기록하고 있다.<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505310020920200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5-05-31&officeId=00020&pageNo=2&printNo=1737&publishType=00020 晴天(청천)에銳氣百倍(예기백배) 愈出愈奇(유출유기)한作戰策(작전책)]</ref><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111600329204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11-16&officeId=00032&pageNo=4&printNo=10502&publishType=00020 思友(사우) 잊을수 없는 그때 그친구 <43> 李性求(이성구) <元老(원로)농구인> (3) 眞正(진정)한맞수 林東洙(임동수)씨 上(상)]</ref> 양교의 실질적인 첫 전면시합이 열린 것은 [[1927년]] [[동대문운동장|경성운동장]]에서 거행된 제8회 [[전조선 축구대회]] 준결승에서의 [[고려대학교 축구부|보성전문학교 축구부]]와 [[연세대학교 축구부|연희전문학교 축구부]]의 대결이 있었으며,<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711050020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7-11-05&officeId=00020&pageNo=2&printNo=2580&publishType=00020 朝鮮體育會主催(조선체육회주최)·東亞日報後援(동아일보후원) 幾多(기다)의波瀾(파란)격고 最後(최후)의决戰(혈전)에]>/ref> 929년에는 보성전문학교가 연희전문학교를 이겨 두 학교의 대결이 일반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1930년에 두 학교가 [[농구]]에서도 막강한 실력으로 서로 겨루게 되면서 이들 경기가 ‘연·보전’(또는 ‘보·연전’)으로 일반에 불리게 되었다.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111600329204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11-16&officeId=00032&pageNo=4&printNo=10502&publishType=00020 思友(사우) 잊을수 없는 그때 그친구 <43> 李性求(이성구) <元老(원로)농구인> (3) 眞正(진정)한맞수 林東洙(임동수)씨 上(상)]</ref> ‘민족적인 경기’가 된 이들 대결에서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은 꾕과리와 징을 울리면서 안암동에서 동대문의 서울 운동장까지 행진하여 연희전문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양쪽으로 응원하면서 경기를 관람하였고, 경기에 이긴 쪽은 우승기를 들고 교가를 부르면서 종로네거리를 행진하였다.<ref name="경향_2">大学街의 裏窓(6) 普專에서代를이은 高麗大學校(中), 《경향신문》, 1962.7.7</ref> [[1943년]]에 [[징병제]]가 실시되어 시합이 중지되기 전까지 연희전문학교는 보성전문학교를 상대로 한 축구대회에서 31전 14승 17패를, 농구대회에서 62전 32승 30패를 기록하였다.<ref name="koyonhistory">{{웹 인용|제목=고연전 역사|url=http://www.kuleader.net/history/history02.php|출판사=고려대학교 응원단|확인날짜=2011-06-06}}</ref>
]>/ref><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111600329204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11-16&officeId=00032&pageNo=4&printNo=10502&publishType=00020 思友(사우) 잊을수 없는 그때 그친구 <43> 李性求(이성구) <元老(원로)농구인> (3) 眞正(진정)한맞수 林東洙(임동수)씨 上(상)]</ref> 양교의 실질적인 첫 전면시합이 열린 것은 [[1927년]] [[동대문운동장|경성운동장]]에서 거행된 제8회 [[전조선 축구대회]] 준결승에서의 [[고려대학교 축구부|보성전문학교 축구부]]와 [[연세대학교 축구부|연희전문학교 축구부]]의 대결이 있었으며,<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711050020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7-11-05&officeId=00020&pageNo=2&printNo=2580&publishType=00020 朝鮮體育會主催(조선체육회주최)·東亞日報後援(동아일보후원) 幾多(기다)의波瀾(파란)격고 最後(최후)의决戰(혈전)에]>/ref> 929년에는 보성전문학교가 연희전문학교를 이겨 두 학교의 대결이 일반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1930년에 두 학교가 [[농구]]에서도 막강한 실력으로 서로 겨루게 되면서 이들 경기가 ‘연·보전’(또는 ‘보·연전’)으로 일반에 불리게 되었다.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111600329204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11-16&officeId=00032&pageNo=4&printNo=10502&publishType=00020 思友(사우) 잊을수 없는 그때 그친구 <43> 李性求(이성구) <元老(원로)농구인> (3) 眞正(진정)한맞수 林東洙(임동수)씨 上(상)]</ref> ‘민족적인 경기’가 된 이들 대결에서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은 꾕과리와 징을 울리면서 안암동에서 동대문의 서울 운동장까지 행진하여 연희전문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양쪽으로 응원하면서 경기를 관람하였고, 경기에 이긴 쪽은 우승기를 들고 교가를 부르면서 종로네거리를 행진하였다.<ref name="경향_2">大学街의 裏窓(6) 普專에서代를이은 高麗大學校(中), 《경향신문》, 1962.7.7</ref> [[1943년]]에 [[징병제]]가 실시되어 시합이 중지되기 전까지 연희전문학교는 보성전문학교를 상대로 한 축구대회에서 31전 14승 17패를, 농구대회에서 62전 32승 30패를 기록하였다.<ref name="koyonhistory">{{웹 인용|제목=고연전 역사|url=http://www.kuleader.net/history/history02.php|출판사=고려대학교 응원단|확인날짜=2011-06-06}}</ref>
 
두 학교간의 대결은 광복 이후 [[1945년]] [[12월 21일]]부터 이틀간 열린 ‘제1회 연보 OB 축구대회’를 통해 부활하였다. [[1946년]]부터는 [[축구]]와 [[농구]]의 재학생 간 정기전이 매년 열리게 되었고, [[1956년]]에는 [[야구]], [[럭비 유니온|럭비]], [[아이스하키|빙구]]의 세 종목이 추가되었다. '''다만,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간 정기전은 [[1946년]] 시작된 [[배재학당]]과 [[양정의숙]]의 [[전 배재 대 전 양정 럭비정기전]]이며, 오늘날과 같은 규모의 정기전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1959년]]의 일이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는 [[5·16 군사정변]] 등의 이유로 정기전이 열리지 않았다.<ref name="koyonhistory" /> [[1965년]]부터는 이틀 동안 다섯 경기가 일제히 치러지는 지금과 같은 경기방식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 점차 정기전 때 고려대학교에서는 크림슨색 티셔츠를 입기 시작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캠퍼스 가득한 크림슨, 비슷해 보여도 다 달라요|url=http://www.kukey.com/news/articleView.html?idxno=16561|출판사=고대신문|저자=김다혜 기자|날짜=2011-05-22|확인날짜=2011-06-09}}</ref> 1971년과 1972년, 1975년, 1980년, 1983년, 1996년에는 정기전이 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