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매케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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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봄 포레스톨 항공모함이 롤링선더 작전의 임무를 맡게 되면서 북 [[베트남]]에 폭격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이때 프레스톨 항공모함이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1967년 10월 경에는 도합 22번의 폭격임무를 수행하였다.
 
1967년 10월 26일 매케인은 하노이시 중심부의 바딘군(quận Ba Đình, 郡巴亭) 엔푸(YÊN PHỤ) 공장지대<ref>{{웹 인용|url=https://www.google.com/maps/place/AmericanY%C3%AAn+WarPh%E1%BB%A5,+Memorial%EB%96%A0%EC%9D%B4%ED%98%B8+Hanoi,+%EB%B2%A0%ED%8A%B8%EB%82%A8/@21.04596070540445,105.83787938311915,16z15z/data=!3m1!4b1!4m5!3m4!1s0x01s0x3135abad7a28224b:0xfef3bcb2286500d10x8e45f7cbb28480a7!8m2!3d21.04690070534316!4d105.83685378393052?hl=ko|제목=American War Memorial|성=안|이름=완식|날짜=2018.10.4.|웹사이트=베트남 전쟁 때 매케인 소령이 추락한 지점|출판사=http://cafe.daum.net/vietnipa/V3UT|언어=ko-US|확인날짜=2018-10-04}}</ref>를 폭격하는 임무를 띠고 A-4 스카이호크를 타고 출동했다가 소련제 SA-2 지대공 미사일을 맞아 추락하게 된다. 그는 두 팔이 골절, 다리에 총상을 입고도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하노이 중심 북부 쭉박 호수(Hô Trúc Bạch, 竹帛)에 떨어져 익사 위기에 처하였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포로로 잡혀 하노이 시의하노이시의 호아로감옥(Nhà Tù Hỏa Lò)에 수용되었다.
 
''베트남은 추락한 이곳에 그의 추락사실을 기록한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는 서호(Hồ Tây, 湖西)와 쭉박호를 가르는 도로의 쭉박호수 쪽 인도에 세워져 있는데 기념비의 뒷 공간이 더 넓어 대부분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버린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한글 번역) 1967년 10월 26일 군과 민간인이 이날 여기 옌푸(YÊN PHỤ) 전기 공장에 (폭탄을) 떨어뜨린 10대 비행기 중의 하나인 미국 해군 소속 부대 공군 소령 JOHN SIDNY McCAIN 비행기 조종사를 수도 하노이 쭉박호(HÔ TRÚC BẠCH)에서 생포했다.''<ref>{{웹 인용|url=https://www.google.com/maps/place/American+War+Memorial/@21.0459607,105.8378793,16z/data=!4m5!3m4!1s0x0:0xfef3bcb2286500d1!8m2!3d21.0469007!4d105.8368537?hl=ko|제목=American War Memorial|언어=ko-US|확인날짜=2018-10-04}}</ref>[http://cafe.daum.net/vietnipa/V3UT/46]
 
일명 "하노이 힐튼"이라는 별명으로 미국 전쟁포로 사이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치료도 제대로 못 받은 채 구타와 고문을 받았다. 그 후 6주를 호아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몸무게는 거의 50파운드(약 23킬로그램)나 빠졌으며 머리는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1967년 12월 그는 하노이 외곽의 포로수용소로 이감 되었다. 같이 수감된 동료들 덕분에 살아난 그는 1968년부터는 독방에 수감되었다. 1968년 7월 그의 아버지 "잭" 매케인 제독이 태평양 사령관이 되자 북 베트남은 외부 선전 목적으로 조기 석방을 제안하였으나 매케인은 "먼저 들어온 사람이 먼저 나간다."는 군인 수칙대로 본인보다 먼저 잡힌 포로들이 모두 석방될 때까지 석방 될 수 없다며 제안을 거절한다.
 
1968년 8월에 매케인은 수많은 고문을 받았으며 강제로 자신들이 "검은 범죄자"이며 "공적"이라는 자백서를 쓰고 서명할 것을 요구 받아 결국 그렇게 썼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문법에 맞지 않는 글을 쓰는 등 강요에 의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이후 그는 "나는 우리 모두가 배운것을 거기서 배웠다: 모든 사람은 부러지는 때가 있고 그때 나는 그 한계에 부딪혔다." 당시 많은 미국포로들이미국 포로들이 비슷한 고문과 자백을 강요받았다. 이때 데이비드 데링거, 톰 헤이던, 레니 데이비스같은데이비스 반전평화같은 반전 평화 단체들이 하노이를 방문해서 그를 만나고자 하는 것을 거절하기도 했다. 제독인 아버지와 연결되어 자신을 이용하고자 하는 북 베트남의 선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였다위해서 였다.
 
1969년 10월부터 매케인과 다른 전쟁포로들에 대한 처우가 갑자기 개선되었으며 1969년 12월에는 "하노이 힐튼"으로 다시 이감되었다. 1970년에야 독방 감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