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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신보'''》(國民新報)는 [[대한제국]] 말기에 발행된 신문이다. [[일진회]]의 기관지였다.
 
== 개요 ==
[[1906년]] 1월에 창간되어 일진회의 세력 확대와 함께 점차 국민신보사의 사세도 확장되었다. [[통감부]]의 통치 정책을 적극 지지하여 이 시기의 대표적인 친일 매체로 꼽힌다. 초대 사장은 일진회장 [[이용구]]가 맡았고, [[송병준]]의 후원을 받았다. 제3대 사장인 [[한석진]]이 [[을사조약]] 체결에 항의해 자결한 [[민영환]]의 부인 박씨에 대한 악평을 신문에 게재하라는 송병준의 지시를 거부하다가 면직된 일도 있었다.
 
[[1909년]] 여름 [[최영년]]이 제5대 사장에 올랐을 때는 매일 수 만 매를 발행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최익현]]의 《[[매천야록]]》에는 국민신보의 주론이 일본의 풍속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라 사람들이 '기관신문'이라 부르며 미워하여 구독하지 않았기에 강제로 관리들에게 판매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어, 자발적인 구독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907년]]에는 [[대한제국 고종]]의 강제 양위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국민신보사를 습격해 사옥을 파괴하고 사원들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 한일 병합 찬성 ==
1909년 10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피살되을 때는 기자 [[김환 (언론인)|김환]]을 [[도쿄]]에 파송해 장례식에 참석하게 하였다. 곧이어 1909년 12월에 일진회가 [[한일 병합]]을 재촉하는 〈[[일한합방상주문]]〉을 상소하는 동시에 대국민 성명서인 〈[[일한합방성명서]]〉를 《국민신보》에 발표했다. 일진회의 성명서에 대한 반대 여론이 일어나자, 사장 최영년이 이는 국리민복을 위한 것인데 일반인들이 오해하여 반대하는 것이 애석하다는 발언을 했다. 최영년은 이 발언 때문에 어느 교사에게 불로 공격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