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왕자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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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왕자의 난'''은 [[1398년]] 왕위 계승권을 에워싸고 일어난 왕자간의 싸움으로, [[조선 태조|태조]] [[조선 태조|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조선 태종|이방원]]이 반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방원의 난'''으로도 불리며, 그밖에 '''방석의 난''', 혹은 '''정도전의 난''',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불린다. [[제2차 왕자의 난]]이 동복(同腹) 형제간의 싸움이라면, 제1차 왕자의 난은 이복 형제간의 싸움이다.
 
== 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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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 ==
이방원은 장자승계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 난을 일으킨 것으로 쿠데타를 정당화하며 세자 자리를 굳이 사양하고 둘째 형인 [[회안대군|이방과]]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는 큰형인 [[진안대군]]이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에는 야심이 없고 무능력한 형 이방과에게 차기 제왕의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아비를 치고 아우들을 살해한 주동자로써의 책임을 떠맡김과 동시에 훗날을 기약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 태조|태조]]는 왕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 그리고 사위 흥안군 이제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한달 뒤인 9월에 [[회안대군|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곧 [[조선 정종|정종]]이다. 이로부터 태조는 상왕(上王)으로 칭하게 되었다. 왕으로 즉위한 [[조선 정종|정종]]은 즉시 생모 절비 한씨를 [[신의왕후]]로 추존하여 [[신덕왕후]] 강씨와 동급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제2차 왕자의 난]]을 거치고 [[조선 정종|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조선 태종|태종]]은 [[신의왕후]]를 수비(首妃: 원비)로 교체하여 [[신덕왕후]]보다 윗서열로 만들었으며, 이로도 성이 차지 않아 [[신의왕후]]를 왕후보다 상급인 왕태후로 격상하였다가, [[신덕왕후]]를 다시 현비로 조정하여 후궁으로 격을 낮추고 [[신덕왕후]]의 소생들을 서자로 격하시킨다. 먼 훗날인 [[조선 현종|현종]] 때 [[신덕왕후]]의 신주가 비로소 태묘(太廟: 종묘)로 옮겨지고 다시 왕후의 예우가 올려지지만, [[조선 현종|현종]] 또한 [[신의왕후]]의 혈손이기에 [[신덕왕후]]를 [[신의왕후]]보다 격을 낮추어 [[신덕왕후]] 강씨가 [[조선 태조|태조]]의 첩으로 출가하였다가 [[신의왕후]]의 사후에 비로소 처로 승격하여 왕비가 된 계비로 조정하였다.
 
[[조선 정종|정종]] 2년([[1400년]])에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 의의 ==
제1차 왕자의 난은 정치적으로 보면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당대 실력자였던 [[정도전]]의 일파를 왕권에 야심이 있던 왕의 오남(五男)인 [[조선 태종|이방원]]의 일파가 집권 세력 내 [[쿠데타]]를 통해 타도하고 권력을 차지한 사건이지만, 좀 더 협의(狹義)로 볼 때에는 이복형제 간의 왕위 쟁탈을 위한 골육상쟁이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