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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무과에 급제해 [[1588년]] [[감찰]]이 되었으나 집안 문제로 파직되었고 [[임진왜란]] 때 다시 재등용되어 [[평양 전투|제1차 평양 전투]]에서 [[대동강]]을 건너려던 일본군을 막아 [[평안도]][[방어사]]가 되었다. [[1593년]](선조 26) [[1월]]에는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조명 연합군]]을 이끌고 [[평양 전투|제4차 평양 전투]]에서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후에는 전쟁의 혼란을 틈타 도적이 활동하자, [[도원수]] [[권율]](權慄)의 명령으로 [[전라북도]] [[남원군]]에서 도적들을 소탕하고 [[1595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승진했으며, 이때 왕명으로 [[동래부]]의 일본군 진영에 있는 [[송상현]]의 관을 찾아오라는 명을 받고 송상현의 관을 적진에서 빼내는데 성공한다. 그는 또 군관 [[이홍발]]을 [[부산]]에 잡입시켜 일본군의 동태를 살폈고, [[1597년]](선조 30)에는 도원수 [[권율]]로부터 [[의령군]]의 남산성을 수비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불목하여 강등당했다. [[1597년]] [[일본]]의 간첩 [[가케하시 시치다유]]의 거짓 정보에 의해 [[이순신]](李舜臣)을 모함하기도 했다. [[1603년]](선조 36) [[충청도]][[병마절도사]] 자리에 올랐으나 부하들을 학대해 다시 파직되었고 [[1604년]]에 다시 기용되었다. 그뒤 전공이 인정되어 포도대장 겸 도정이 되었다. [[1609년]] 정주목사, 만포진 첨절제사, 북로방어사, [[1615년]](광해군 7년) 길주목사를 거쳐 이듬해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1618년]](광해군 10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1619년]] [[명나라]]가 [[후금]]을 토벌하기 위해 구원병을 요청하자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나갔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후금]]에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고 이후 비밀리에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그러나 후일 탈출에 성공한 부하 병사 김진(金進)의 보고에 의하면, 병으로 죽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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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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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글|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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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564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