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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5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奉天省 柳河縣 三源堡)에서 조직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많은 동포가 만주로 이주하는 기회를 이용, “本國에 入하야 血戰을 斷行하기를 期圖하며, 外地에 在하여는 自治를 施行”하려는 목적으로 화서학파 [[박문일]]·[[유인석 (의병장)|유인석]] 계열의 의병 수령, 향약계, 포수단 등이 모여 유하현 삼원포 서구 대화사(柳河縣 三源浦 西溝 大花斜)에서 결성했다. 기존 학설은 [[1919년]]에 대한독립단이 결성되면서 도총재부와 총단의 전체 조직을 갖춘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자해]](李慈海)의 회고록<ref>이자해, 《李慈海自傳》, 국가보훈처, 2007.</ref> 에 의하면 먼저 [[조맹선]]을 단장으로 하는 대한독립단이 조직되고 나서 다시 [[대한독립단총단]]으로 발전된 것이다.<ref>조준희, 〈평안도 화서학파의 항일독립운동: 광복회ㆍ대한독립단 결성을 중심으로〉, 《화서학논총》5, 화서학회, 2012.</ref> 그리하여 [[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圭)·[[조병준]](趙秉準) 외에 [[박장호]](朴長浩)·[[전덕원]](全德元)·[[박양섭]](朴陽燮) 등이 독립 쟁취를 위한 단일기관으로 이 단체를 강화하였다.
 
== 총단 조직 ==
*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김원섭]](金元燮)·[[최영호 (독립운동가)|최영호]](崔永浩), 군사부장 [[전덕원]], 참모부장 [[조병준]],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재무부장 [[강세헌]](康世憲), 서무 [[김일]](金逸), 고문 [[안병찬]](安秉瓚)이 임명되었으며, 이 밖에도 많은 부서와 간부들이 있었다.
** 지방조직으로는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전덕원]]·[[김승학]](金承學)·[[백의범]](白義範) 등이,
** 만주 집안현(集安縣)·장백현(長白縣) 등지에서 [[맹헌규]](孟憲奎)·[[유일우]](劉一優) 등이 활약하였다.
** 국내외 모두 100여 개소의 지단·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지역에는 거류 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여 구관(區管)을 두고 10구에 단장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 국내의 지단조직은 국내 총지단장에 [[홍제업]](洪濟業),
**** 평안북도 [[정우범]](鄭禹範),
***** 용천군 [[이후관]](李厚觀),
***** 철산군 안병철 (安秉哲),
***** 영변군 [[신태익]](申泰翼),
***** 정주군 [[조현균]](趙賢均),
***** 태천군 [[백낙기]](白樂基),
***** 가산군 [[오봉희]](吳鳳熙),
**** 평안남도 [[안창일]](安昌一),
**** 경기도 [[한덕리]](韓悳履),
***** 수안 [[최일호]](崔一浩) 등이었다.
*** 만주지방 조직으로는 장백현 총지단장에 [[유일우]],
**** 집안현 유수림자(楡樹林子) [[최남표]](崔南表),
**** 집안현 외차구(外岔溝) [[홍승국]](洪承國) 등이었다.
 
이들은 3, 4명씩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남북도의 조선총독부 예하 경찰을 습격하고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대시켜갔다.
 
== 활동 ==
* [[1919년]] 8월 최고 1,500명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그 중 700명의 독립군을 하얼빈(哈爾濱) 주둔 백계 러시아부대에 파견해 군사훈련을 받게 하고, 9월경 노령(露領)으로도 2개 소대를 보냈다. 이들은 시베리아에서 훈련과 무기 구입에 주력하였다.
* 12월 본부 밑에 4개 중대를 편성해 남만주 제1사단이라 하고, 무송현(撫松縣)에 사단본부를 설치하였다.
*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실시에 따라 조병준이 평안북도 독판(督辦)이 되어 공채를 모집하기도 하였다.
* [[1920년]] 3, 4월 결사대들이 평안도 신의주·의주 등에서 친일세력의 처단에 주력하였다.
* 또한, 본단의 목적인 남만주와 우리 나라 내부의 기맥을 상통해 독립의 완전한 성취를 도모하고자 전국적으로 모군(募軍)·모금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중에서도 태천(泰川) 지단에서는 유림 [[김인수]](金仁叟) 등의 활동으로 다수 단원을 포섭해, 본단 내지분치기관임시통칙(內地分置機關臨時通則)에 의해 의용대를 조직하였다.
* 그리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폭약을 구입, 관공서 파괴를 계획하던 중 다수의 단원이 붙잡혔다.
* [[유일우]]·[[김병연]](金秉淵)·[[박기연]](朴基淵) 등은 장백현 일대에서 많은 자금을 모금했으며, 안도(安圖)·무송현 등지와 연락하면서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 그 뒤 연호문제로 노년층과 청년층이 대립하였다. 단군기원 또는 융희를 주장하는 [[박장호]]·[[백삼규]]·[[전덕원]]·[[이웅해]](李雄海)·[[김평식]] 등의 기원독립단(1920.4)과 대한민국 연호사용을 주장한 [[조병준]](趙秉準)·[[신우현]](申禹鉉)·[[변창근]](邊昌根)·[[김승학]] 등의 민국독립단(1920.4)으로 분리 대립했지만, 독립운동에는 상호 협력하였다.
 
== 해산 ==
* [[1920년]] 7월 광복단(1920.4 이탁)을 중심으로 [[광복단]], 민국독립단, [[대한청년단연합회]]를 통합해 [[광복군총영]]([[오동진]])으로 개편하였다.
* [[1920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한독립단, [[대한청년단연합회]], [[의용단]]을 통합해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사령부]]([[조맹선]])로 조직하였다.<ref>《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ref><ref>《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秘史)》(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9)</ref>
* → 하지만 산하 무장독립군과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광복군총영]]은 임시정부 조직개편안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광복군사령부]]는 명목상 조직이다.
 
== 같이 보기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광복군사령부]]
 
== 각주 ==
{{각주}}
 
[[분류:대한독립단| ]]
[[분류:1919년 설립]]
[[분류:1920년 해체폐지]]
[[분류:한국의 독립운동단체]]
[[분류:대한독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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