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트 왕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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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트 왕조'''(Kartids Dynasty)는 호라산 지방을 지배했던 [[페르시아]] 지방의 왕조이며 수도는 [[헤라트]]였다. 카르트 왕조는 [[일 칸국]]의 첫 번째 신하국이었지만 [[일 칸국]]이 해체되면서 [[1335년]] 독립하여 [[1381년]] [[티무르]]의 침입이 있기까지 존속하였다.
== 왕조의 성립 ==
카르트 왕조의 중요한 초기 인물은 타주드(Taju'd-Din 'Uthman-i-Marghini)와 이주드(Izzu'd-Din 'Umar-i-Marghini) 형제이다. 두 형제는 아프가니스탄 고르 지방의 지배자인 무함마드를 섬겼는데 나중에는 와지르(중신)의 자리에 올랐다. 타주드의 아들인 루크누(Malik Ruknu'd-Din Abu Bakr)는 타주드가 사망한 뒤 얼마 지나 술탄의 여식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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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탄]] 지역을 예속받은 후 샴수드는 [[일 칸국]]의 [[훌라구]]를 1263~4년 사이에 만났다. 3년 후에는 [[훌라구]]의 후계자인 [[아바카 칸]]을 만났으며 1276~7년 사이에는 세 번째로 일칸을 찾아갔으나 [[아바카 칸]]은 샴수드를 의심하여 1278년 1월에 그를 암살하였다. 이 때 일칸은 [[타브리즈]]에 와 있던 샴수드가 목욕을 하고 있을 때 독이 든 수박을 건네 그를 독살했다고 한다. 샴수드는 이란의 얌(Jam)에 묻혔다.
== 1278년-1307년 ==
{{이란의 역사}}
{{대 이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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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후 파크루의 군대는 [[가잔 칸]]의 후계자 [[울제이투]]와 싸웠다. [[울제이투]]는 파크루가 말리크 위를 계승한 후 얼마 되지 않아 1만 명의 군대를 [[헤라트]]로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파크루는 도시를 내준 후 반격하는 수법으로 승리하였으며 적장 바하두르는 전사하였다. 파크루는 1307년 2월 26일에 사망하였고 [[헤라트]]와 길란(Gilan)은 결국 [[울제이투]]의 손에 떨어졌다.
== 1307년~1331년 ==
파크루의 사후 그의 동생인 기야투(Ghiyathu'd-Din)가 말리크 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다른 동생인 알라우(Ala'u'd-Din)와 왕위 다툼을 벌이다가 일칸 [[울제이투]]에게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호소했다. 파크루가 일칸의 궁정에 찾아갔을 때 [[울제이투]]는 그를 성대하게 환영했다. 기야투는 1307~8년 사이 호라산으로 돌아왔으나 끊이지 않는 다툼으로 다시 일칸을 만나러 1314~5년 사이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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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아들이 넷(샴수드, 하피즈, 무이즈, 바키르) 있었는데 샴수드는 그의 뒤를 이었지만 곧 세상을 떴다. 둘째 아들 하피즈는 학자로 활동했으나 샴수드가 죽은 후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하피즈 역시 2년 후 시해당하고 왕위는 셋째 무이즈에게 넘어갔다.
== 1331년~1370년 ==
무이즈(Mu'izzu'd-Din Husain) 즉위 4년 후 일칸 [[아부 사이드 (일 칸국)|아부 사이드]]가 죽자 [[일 칸국]]은 급속하게 해체되었다. 무이즈는 [[토가 테무르]]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그와 동맹을 맺었다. 무이즈는 [[토가 테무르]]의 실력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일 칸국]]의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무이즈의 골칫거리는 토가 테무르의 적인 사르바다르인(Sarbadars)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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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9년 그는 [[토가 테무르]]에게 보내는 공물을 끊고 자신이 [[술탄]]으로서 독립하여 통치한다고 선언했다. [[토가 테무르]]는 사르바다르인에게 [[1353년]] 살해당하여 카르트 왕조에 더이상 위협이 되지 못하였다. 1358년 쯤 차가타이의 카자간이 호라산으로 침입하여 [[헤라트]]를 포위했다. 차가타이 군대는 카자간의 암살로 인해 후퇴했고 무이즈의 지배는 재건되었다.
사르바다르인은 1362년 쳐들어왔지만 다시금 내부 문제가 발생하여 무이즈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얼마 후 사르바다르의 알리-이 무야드(Ali-yi Mu'ayyad)로부터 시아 파 데르비쉬(Dervish)들이 카르트 왕조로 망명해 왔다. 이 동안 [[티무르]]와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카르트 왕조가 그의 영역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무이즈가 1370년에 죽자 사라크(Sarakh)와 쿠히스탄(Quhistan)의 일부를 제외한
== 1370년~1383년, 멸망 ==
기야스(Ghiyas al-Din)는 [[토가 테무르]]의 손자로 그의 어머니는 카툰 술탄이었다. 그는 데르비쉬 망명자들로 하여금 사르바다르의 내부를 혼란스럽게 하는 계책을 썼다. 이에 대항하여 사르바다르의 알리-이 무야드는 무함마드와 결탁했다. 기야스가 무함마드를 제거하려 할 때 알리-이 무야드는 병력을 동원해 방어했다. 그런데 사르바다르는 내부 갈등으로 주도권을 쥐는 데 실패하여 더 이상 이 사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이를 틈타 기야스는 [[니샤푸르]]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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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야스는 [[티무르]]의 신하가 되었으나 1383년 [[헤라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기야스는 [[티무르]]의 아들 [[미란 샤]]에게 진압되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처형되었다. 같은 해 일어난 또다른 반란도 [[미란 샤]]가 진압했다. 이 피바람 속에서 살아 남은 카르트 왕조의 인사들마저 [[미란 샤]]가 베푼 연회에서 살해당했다. 이렇게 해서 카르트 왕조는 [[티무르]]가 감행한 [[페르시아]] 원정의 첫 희생양이 되었다.
== 카르트 왕조의 계보 ==
* [[루크누]] (?~1245/6)
* [[샴수드]] (1245/6~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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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야스]] (1370~1381)
== 같이 보기 ==
* [[일 칸국]]
* [[추판 왕조]]
* [[티무르]]
[[분류:이란의 역사]]
[[분류:1335년 설립]]
[[분류:1381년
[[분류:중앙아시아의 옛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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