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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역사}}
 
'''로마 제국''' 또는 '''동로마 제국''', '''중세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비잔틴 제국'''({{llang|en|Byzantine Empire 혹은 Eastern Roman Empire}})은 [[중세 시대]]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이후의 [[로마 제국]]을 일컫는 명칭으로,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였고 [[로마 제국의 황제|로마 황제]]가 다스렸다. 이 나라는 ‘로마 제국’으로 불렸고 제국 주민과 주변 나라 사람들은 ‘로마니아’({{lang|el|Ῥωμανία}})라고 부르기도 했다.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을 구분하는 것은 그저 긴 로마 제국의 역사를 편의상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오스만을 비롯한 주변 나라들도 비잔틴을 엄연히 '로마 제국'으로 인식했다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동로마와 로마 제국을 별개의 나라로 인식하는 것은 서유럽 중심의 역사 사관에서 비롯된 오해이다. 소위 '비잔틴 제국'이 성립한 시점을 정확히 잡을 수는 없으나 보통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데이아]]에서 [[보스포로스 해협]]의 [[비잔티온]]([[콘스탄티노폴리스]], 혹은 ‘새로운 로마’)으로 천도한 서기 330년이 분수령이다.{{#tag:ref|공문서에서 "새로운 로마"로 쓰인 첫 사례는 기원후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법령에서 나온다. 여기서 이 말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가 로마 총대주교좌보다 밑에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고자 쓰인다.<ref>{{harvnb|Benz|1963|p=176}}.</ref>|group="주"}}
 
서기 330년 혹은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사망인 395년 이후부터 1453년까지 존속했다. 제국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전제 군주제]] 국가였고 한때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써 [[로마 제국]]의 고토를 거의 되찾아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그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 중동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에게 해]]의 무역로에 자리 잡고 있어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전 세계 부의 3분의 2가 모인다고 할 정도) 게다가 제국은 외적인 [[사산 제국|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아랍 제국|아랍]]에 침략받아 영토를 잃기도 했으나 10세기 말 [[마케도니아 황조]] 시대에 국력을 회복하여 동지중해 패권국이 되어 [[파티마 왕조]]와 대결한다. 그러나 1071년 제국의 심장부인 [[소아시아]] 대부분을 [[셀주크 튀르크]] 세력에게 잃는다. [[12세기]]에 [[콤네노스 황조]]가 영토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 몰후 제국은 쇠퇴기로 다시 접어든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수도를 점령하여 제국 영토가 [[로마인]]과 [[라틴인]](서유럽인)의 각축장이 되면서 제국은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한 타격을 입었다. 1261년에 팔라이올로고스 황조가 정권을 탈취한 뒤, 수도를 수복하면서 제국을 재건했으나 [[14세기]] 후반 내전으로 인해 제국은 사실상 멸망했다.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이 침공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 로마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 국호 ==
'비잔티움 제국'은 [[영어]]식으로 ‘the Byzantine Empire’라고 표기하며, [[대한민국]]에서는 이 영어식 표기를 그대로 써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렀으나 최근에는 원어를 살려 비잔티움 제국으로 표기하거나 ‘동로마 제국’으로 쓰기도 한다.
 
1557년 [[서유럽]]에서 [[독일인]]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제국의 사료를 모은 로마 역사집(Corpus Historiæ Byzantinæ)을 출간하면서 칭하게 된 ‘로마’이란 표현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천도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된 [[비잔티온]](기원전 667년에 [[메가라]]의 식민자들이 세운 그리스 도시)에서 나온 말이다. 이때부터 제국 수도의 구 명칭인 ‘비잔티움’은 사서나 시문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1648년 '루브르의 비잔티움'(''Byzantine du Louvre'', Corpus Scriptorum Historiæ Byzantinæ)이 출판되고, 1680년 [[뒤 캉주]]의 '비잔티움 역사'(Historia Byzantina)가 출판되면서 [[몽테스키외]]를 위시해 프랑스 작가들 사이에서 '비잔티움'이라는 표현이 널리 퍼져 친숙해졌다.<ref>Fox, [http://www.romanity.org/htm/fox.01.en.what_if_anything_is_a_byzantine.01.htm What, If Anything, Is a Byzantine?]</ref> 그이후 이 표현은 [[서방 세계]]에서 19세기에 일반 용어으로 굳어졌다.<ref>{{harvnb|University of Chile: Center of Byzantine and Neohellenic Studies|1971|p=69}}.</ref>
 
제국 사람들은 자국을 ‘로마 제국', ‘로마인들의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Imperium Romanorum,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Αρχη τῶν Ῥωμαίων), ‘로마니아'{{#tag:ref|비공식명으로 ‘로마인들의 땅’을 뜻하는‘로마니아'<ref>{{harvnb|Fossier|Sondheimer|1997|p=104}}.</ref> 도 범용됐다. 이 용어는 오늘날 [[루마니아]]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group="주"}}([[라틴어]]: Romania, [[그리스어]]: Ῥωμανία),‘로마 공화국'‘([[라틴어]]: Res Publica Romana, [[그리스어]]: Πολιτ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ref>{{웹 인용|url=http://dio.sagepub.com/cgi/reprint/31/124/47 |title=Nation and Liberty: the Byzantine Example|doi=10.1177/039219218303112403 |publisher=Dio.sagepub.com|date=|accessdate=2010-08-07}}</ref>, ‘그라이키아'(Γραικία),<ref>[[Theodore the Studite]]. ''Epistulae'', 145, Line 19 ("ή ταπεινή Γραικία") and 458, Line 28 ("έν Αρμενία καί Γραικία").</ref>, ‘로마이스’(Ῥωμαΐς)라고 불렀다.<ref>{{harvnb|Cinnamus|1976|p=240}}.</ref>
 
제국은 오랜 세월 다민족 국가이면서도 <ref>{{harvnb|Ahrweiler|Laiou|1998|p=3}}; {{harvnb|Mango|2002|p=13}}.</ref> [[그리스-로마 세계|그리스-로마]] 전통을 계승한 나라였다.<ref>{{harvnb|Gabriel|2002|p=277}}.</ref> 당대 서방과 북방에서는‘그리스인들의 제국'{{#tag:ref|‘임페리움 그라이코룸’(Imperium Graecorum), ‘그라이키아’(Graecia), ‘유나스탄’(Yunastan) 등을 이르는 말이다. 기타 서방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제국’(imperium Constantinopolitanum), ‘로마니아의 제국’(imperium Romaniae)으로 부르기도 했다.|group="주"}}이란 표현이 쓰였는데,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 점차 [[비잔티움 그리스인|그리스적 요소]]가 우세해졌기 때문이다.<ref>{{harvnb|Ahrweiler|Laiou|1998|p=vii}}; {{harvnb|Davies|1996|p=245}}; {{harvnb|Moravcsik|1970|pp=11–12}}; {{harvnb|Ostrogorsky|1969|pp=28, 146}}; {{harvnb|Lapidge|Blair|Keynes|1998|p=79}}; {{harvnb|Winnifrith|Murray|1983|p=113}}; {{harvnb|Gross|1999|p=45}}; {{harvnb|Hidryma Meletōn Chersonēsou tou Haimou|1973|p=331}}.</ref>
 
서방 세계에서는 동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이 [[로마 제국]]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뜻도 있이서 '그리스인들의 제국'(Imperium Graecorum)이라고 칭하기도 한다.<ref>{{harvnb|Fouracre|Gerberding|1996|p=345}}: "The Frankish court no longer regarded the Byzantine Empire as holding valid claims to universality; instead it was now termed the 'Empire of the Greeks'."</ref> 적들에게서 자신을 지킬 도움이 필요했던 [[교황 레오 3세]]는 로마 제국의 황위가 공위 상태라고 간주하고 서기 800년 [[샤를마뉴]]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여 대관식을 치렀으므로, 로마의 여황 [[아테네의 에이레네]] 시대 때 (남성 황제가 아니므로) 기존 로마 제국의 권위는 도전받았다.
533년 황제가 [[북아프리카]] 구 속주의 [[반달족]]을 축출하게 [[벨리사리우스]] 장군과 군대 15,000명을 파견하면서 서방 정복이 시작되었다. 이 사람들은 경이로울 정도로 쉽게 승리했으나 548년이 되어서야 주요 독립 부족들을 복종시켰다.<ref name="Ev" /> 이탈리아 [[동고트 왕국]]에서 [[테오도리크]] 대왕이 죽고 그 사람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아탈라리크]]와 대왕의 딸 [[아말라순타]]는 권력이 약한 [[테오다하드]]를 왕위에 올렸다. 535년 소규모 로마 제국 원정대가 [[시칠리아]]로 파견되어 손쉽게 승리하였으나 고트족의 저항이 커졌으며, 벨리사리우스가 로마와 [[나폴리]]를 포위하여 함락하고 [[라벤나]]를 수복한 540년에야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ref name="B180-216">Bury, 1923,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econdary/BURLAT/18C*.html 180–216]</ref>
 
[[파일:LocationByzantineEmpire.png|upright위오른쪽|섬네일|left왼쪽|250 px|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비잔티움 제국의 판도.]]
 
그러나 546년 12월 17일 동고트족은 [[토틸라]]의 지휘 아래 이내 규합하여 로마를 함락하였다. 549년 초 벨리사리우스는 결국 소환되었다.<ref name="B236-258">Bury, 1923,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econdary/BURLAT/19B*.html 236–258]</ref> 뒤이어 551년 말 아르메니아인 [[환관]] [[나르세스]]가 군대 35,000여 명을 이끌고 고트족을 물리쳤다. 토틸라는 [[부스타 갈로룸 전투]]에서 패사하였다. 그 사람을 계승한 [[테이아스]]도 552년 10월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패하였다. 일부 고트족 부대가 계속 저항하였고 [[프랑크족]]과 [[알레마니족]]이 침입하였으나 이탈리아에서 전쟁은 결국 일단락되었다.<ref name="B259-281">Bury, 1923,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econdary/BURLAT/19C*.html 259–281]</ref> 551년 [[히스파니아]]의 [[서고트족]] 귀족 [[아타나길드]]는 왕에 반역하고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도와달라고 청했다. 황제는 늙었지만, 훌륭한 군 사령관 리베리우스에게 군대를 주어 파견하여 로마 제국은 [[헤라클레이오스]] 시대까지 [[스파니아]](Spania)의 일부 지역을 점유했다.<ref name="B86-288">Bury, 1923,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econdary/BURLAT/19D*.html 286–288]</ref>
[[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를 죽이자 페르시아의 호스로우는 이를 구실로 로마령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침공했다.<ref>{{harvnb|Foss|1975|p=722}}.</ref> 포카스는 로마 사료에서도 줄곧 '폭군'으로 묘사될 정도로 인기가 없는 지배자였으며 원로원에서는 포카스를 목표해 줄곧 심모했다. 610년에 포카스는 [[카르타고]]에서 뱃머리에 이콘을 붙인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온 [[헤라클레이오스]]에게 결국 폐위된다.<ref>{{harvnb|Haldon|1990|p=41}}; {{harvnb|Speck|1984|p=178}}.</ref> 헤라클레이오스가 즉위하자 사산 왕조는 소아시아로 깊숙히 쳐들어왔으며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십자가]]를 [[크테시폰]]으로 가져갔다.<ref>{{harvnb|Haldon|1990|pp=42–43}}.</ref> 헤라클레이오스가 한 반격은 성전으로서 성격을 띄며, 기독의 [[아케이로포이에토스]] 성상이 군기로 쓰였다.<ref>{{harvnb|Grabar|1984|p=37}}; {{harvnb|Cameron|1979|p=23}}.</ref> (626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아바르족]]을 무찌를 때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오스 1세|세르기오스 1세 총대주교]]가 성모 성상을 들고 수도 성벽을 돌았던 덕으로 간주됐다.)<ref>{{harvnb|Cameron|1979|pp=5–6, 20–22}}.</ref> 사산 왕조의 주요 군대는 627년 [[니네베 전투 (627년)|니네베]]에서 궤멸되었고 629년에 헤라클레이오스는 성십자가를 되찾아 엄숙한 의식을 치르며 예루살렘으로 다시 옮겼다.<ref>{{harvnb|Haldon|1990|p=46}}; {{harvnb|Baynes|1912}}, ''passim''; {{harvnb|Speck|1984|p=178}}.</ref> 이 전쟁으로 양 제국 모두 국력을 소진한 후 발흥한 [[무슬림의 정복|아랍 무슬림 군대]]의 침공에 무력하게 되었다.<ref>{{harvnb|Foss|1975|pp=746–747}}.</ref> 로마인은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아랍인에게 대패했고 634년에 크테시폰이 함락된다.<ref>{{harvnb|Haldon|1990|p=50}}.</ref>
 
[[파일:Byzantiumby650AD.svg|섬네일|left왼쪽|350px|650년의 로마 제국. 이 해에 제국은 [[카르타고 관구]]를 제외한 나머지 남부 속주를 전부 잃었다.]]
 
이제 아랍인은 시리아와 레반트를 확고히 장악했고 아나톨리아도 곧잘 급습했으며 674년에서 678년에는 심지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전투 (674년)|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도 공성전을 벌였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의 불]] 덕분에 아랍 함대를 무찔렀고 [[우마위야 왕조]]와 30년간 휴전 조약을 조인했으나<ref>{{harvnb|Haldon|1990|pp=61–62}}.</ref> 아나톨리아 공격은 계속됐고 고전기의 도시 문화는 가파르게 쇠퇴했으며, 여러 도시민들은 구 도시 성곽 내의 더욱 좁은 지역을 재요새화하거나 주변 요새로 아예 이주했다.<ref>{{harvnb|Haldon|1990|pp=102–114}}.</ref>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도시 규모도 상당히 줄었는데 618년에 이집트를 페르시아인에게 빼앗기면서 자유롭게 이용할 곡물 생산지를 잃자 인구 500,000여 명에서 겨우 40,000여 명에서 70,000여 명으로 줄었다. (629년에 이집트 속주를 되찾았으나 642년에 아랍인의 침공으로 다시 잃었다)<ref>{{harvnb|Wickham|2009|p=260}}.</ref> 구 반자치 수준의 공공 제도가 무너지면서 들어선 [[테마 제도]]에 따라 아나톨리아를 각 군대가 담당한 '속주'로 분할하여 민간 업무를 담당하고 제국 행정에 직접 관리받게 되었다. 테마 제도는 헤라클레이오스가 임시변통으로 마련한 방책에서 기원했으나 7세기에 이 제도는 제국 행정의 새로운 제도로 자리 잡는다.<ref>{{harvnb|Haldon|1990|pp=208–215}}; {{harvnb|Kaegi|2003|pp=236, 283}}.</ref>
재정복 과정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다. 크레테 섬을 잠시 재정복했다가(843년) 로마 군대는 [[보스포로스 해협]]에서 패배한 와중에 황제들은 무슬림의 잇따른 [[시칠리아]] 침략을 막지 못했다. (827년~902년) 무슬림은 오늘날 [[튀니지]] 땅을 발판 삼아 831년에는 [[팔레르모]]를, 842년에는 [[메시나]]를, 859년에는 [[엔나]]를, 878년에는 [[시라쿠사]]를, 900년에는 [[카타니아]]를, 902년에는 로마의 최후 거점이었던 요새 [[타오르미나]]를 정복한<ref name="Norwich">[http://books.google.com/books?id=5rOePwAACAAJ&hl=ko]</ref> 후 로마 제국은 타지에서 복수에 성공하는데 이집트의 [[다미에타]]로 원정해 승리하고 (856년), 멜리테네 아미르를 무찔렀으며 ([[랄라카온 전투]], 863년), 바실레이오스 1세는 [[유프라테스]] 강 쪽으로 반격했다. (870년대) 제국은 시칠리아를 잃었으나 바실레이오스 1세는 남부 이탈리아 지방은 잘 지켜내어 향후 200년간 이 땅은 로마 제국 영토로 남는다.
 
904년에 로마를 배반한 [[트리폴리의 레온]]이 이끄는 아랍 함대가 제국의 제2 도시인 [[테살로니키]]를 약탈하면서 제국은 시련에 처했다. 로마 군대는 908년에 아랍 함대를 파괴하여 보복했으며, 2년 후에는 시리아의 [[라오디케이아]] 시를 약탈했으나 로마 제국은 무슬림 세력에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일격하지 못했고 이 사람들은 911년에 크레테 수복을 시도하면서 제국 군대를 대타격했듯 로마 제국과 아랍 간 경계는 번갈하 반격하고 방어하는 부단히 흘러 움직이는 상황인 일변, [[바랑인]]이 86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처음 침략하면서 제국의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941년에 이 사람들은 보스포로스 해협의 아시아 쪽 해안에 나타났으나 금번에는 격퇴돼 907년에 로마 제국이 바랑인과 외교 조약으로써 침략자를 막으면서 제고된 제국의 군사상 위상을 현로했다. 바랑인을 무찌른 사람은 유명한 장군인 [[요한네스 쿠르쿠아스]]로,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유명하게 승리하고 (943년), [[에데사]]를 재정복한(944년) 일은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만딜리온]] 성물을 되찾아와 경축받았다.<ref name ="Norwich"/>
 
병사 출신의 황제인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963년~969년 재위)와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969년~976년)는 제국의 영토를 [[시리아]]까지 넓히고 [[이라크]] 북서부의 토후들을 무찔렀으며, 크레테와 [[키프로스]]를 되찾았다. 요한네스 1세 치세에는 제국 군대가 남으로 예루살렘까지 위협하기도 했다. 제국 최대 위협인 [[파티마 왕조]]가 자리 잡은 동부에서 [[알레포]] 토후령과 인근 지역은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다.<ref name=Norwich /> 수차 전쟁 끝에 바실레이오스 1세가 로마령 시리아를 평정하고자 기병 40,000명을 급파하여 제국은 아랍의 최후 위협 세력을 무찌른다. 불가리아와 시리아에서 승리해 얻은 잉여 자원을 동원해 바실레이오스 2세는 아랍인이 장악하던 시칠리아를 수복할 원정을 계획한다. 1025년에 바실레이오스 2세 몰후, 1040년대에 원정대가 출정해 당초 목적을 빈약하게나마 이룬다.<ref name ="Norwich"/>
 
==== 불가리아와 제국 간 전쟁 ====
 
[[파일:Basilios II.jpg|섬네일|upright위오른쪽|불가르인의 학살자 바실레이오스 2세 황제.]]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 간 계속 이어진 해묵은 갈등은 새로이 기독교화한 불가리아에서 양 세력의 종교상 수위권을 놓고 재대두했다. 이 일로 894년에 불가리아의 강력한 차르 [[시메온 1세]]가 제국을 침공했으나 제국은 외교 수단을 동원해 헝가리인에게 구구해 이 사람들을 물리쳤으나 [[불가로피곤 전투]](896년)에서 로마는 패배했고 불가리아인에게 연공을 바쳐야했다. 912년에 시메온은 한술 더 떠 로마 제국이 자신에게 불가리아 황제인 바실레우스의 관을 부여하고 어린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게끔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차르가 한 계획은 좌절되었으나 그 사람은 트라키아를 재침공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했다.<ref name=Norwich />
만지케르트 패한 후 [[콤네노스 황조]]의 노력으로 제국의 국력은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ref name="M124">{{harvnb|Magdalino|2002|p=124}}.</ref> 콤네노스 황조의 첫째 황제는 [[이사키오스 1세]](1057년~1059년 재위)였고 둘째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는 등극하자마자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 사람의 아들 [[보에몽 1세|보에몽 드 타란토]]가 이끄는 노르만족에 침략받았는데 이 사람들은 [[디라키온]]과 [[케르키라]]를 점령하고 [[테살리아]]의 [[라리사]]를 포위했다. 1085년에 기스카르가 죽으면서 노르만족 문제는 일시로나마 완화했다. 이듬해에는 셀주크 술탄이 죽어 술탄국은 내홍으로 갈라졌다. 알렉시오스는 1091년 4월 28일에 [[레부니온 전투]]에서 [[페체네그족]]을 자력으로 급습해 섬멸했다.<ref name="Br" />
 
[[파일:Histamenon nomisma-Alexius I-sb1776.jpg|섬네일|left왼쪽|테살로니케 조폐소의 첫 동전.]]
 
서부 지역의 안정을 확보한 알렉시오스는 어려운 경제 상황과 흩어진 제국의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방비 문제에 주목했으나<ref name=Birkenmeier>{{harvnb|Birkenmeier|2002}}.</ref> 황제는 셀주크 세력이 차지한 소아시아 고토를 회복하기엔 인력이 불충분했다.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알렉시오스의 사절이 [[교황 우르바노 2세]]에서 동방에서 기독교도가 겪는 곤란을 전하고 서방이 돕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계속 무슬림에 지배받게 되리라고 역설했다. 교황은 알렉시오스의 요청이 서유럽을 결합하면서 교황의 권력을 강화할 기회라고 판단했다.<ref name=Harris>{{harvnb|Harris|2003}}; {{harvnb|Read|2000|p=124}}; {{harvnb|Watson|1993|p=12}}.</ref> 1095년 11월 27일 우르바노 교황은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모든 사람이 십자가의 표식하에 무기를 들고 예루살렘과 동방을 무슬림에게서 탈환하고자 무장 [[순례]] 원정을 개시하자고 촉구했다. 서유럽은 매우 흥분하여 미친 듯이 날뛰었다.<ref name="Br" />
1118년 알렉시오스의 아들인 [[요한네스 2세 콤네노스]]가 아버지를 계승해 제위에 올라 1143년까지 통치했다. 성실하고 심신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황제인 요한네스는 반세기 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제국이 입은 해 만회에 적임자였다.<ref>{{harvnb|Norwich|1998|p=267}}.</ref> 경건하면서 온화해 공정한 정치로 유명한 요한네스 2세는 잔인한 방식이 통하던 당시에 보기 드물게 도덕 규범에 적합한 지도자였으므로<ref>{{harvnb|Ostrogorsky|1969|p=377}}.</ref> 로마 제국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불렸다. 25년 치세 동안 요한네스는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했고 [[베로이아 전투]]에서 페체네그족을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격퇴했으며<ref name="B90">{{harvnb|Birkenmeier|2002|p=90}}.</ref> 소아시아에서 튀르크족을 상대로 수많은 전쟁을 친히 지휘했다. 요한네스가 전쟁 덕에 동방에서 힘의 균형이 근본으로 바뀌어 투르크족을 수세로 몰았고 소아시아 반도의 수많은 읍락, 요새, 도시를 수복했으며<ref name="SJ">Stone, [http://www.roman-emperors.org/johncomn.htm John II Komnenos].</ref> 1120년대에 헝가리인과 세르비아인의 위협을 좌절시켰고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족 임금 [[루지에로 2세]]에 대항하여 [[독일의 군주 목록|독일 황제]] [[로타르 3세]]와 동맹한다.<ref name="BrJ">{{백과사전 인용|title=John II Komnenos|encyclopedia=Encyclopædia Britannica}}.</ref> 치세 후반기에 동방에서 주로 활동한 요한네스 황제는 [[멜리테네]]의 [[다니슈멘드]] 토후국을 무찌르고 [[킬리키아]]를 재정복했으며, 안티오케이아 공작 [[푸아티에의 레몽]]을 제압해 로마 제국의 수위권을 확인했다. 로마 제국 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현로하고자 로마 제국과 십자군 국가의 연합군을 앞세워 [[성지]]로 진군한 요한네스 황제는 기운차게 활동할 힘이 넘치게 원정을 강행했으나 여러 십자군동맹이 배반하여 좌절됐다.<ref>{{harvnb|Harris|2003|p=84}}.</ref> 1142년에 요한네스 황제는 안티오케이아를 재압박하여 자신이 한 주장을 관철하려고 했으나 1143년 봄에 사냥하다가 사고로 죽자 레몽은 용기를 얻어 킬리키아를 침공했으나 패하고 새 황제에게 자비를 청하고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야 했다.<ref name="B326">{{harvnb|Brooke|2008|p=326}}.</ref>
 
[[파일:The Byzantine Empire, c.1180.PNG|섬네일|left왼쪽|300px|콤네노스 시대가 막바지에 접어든 1180년경 로마 제국의 영토.]]
 
요한네스가 황제로 선택한 사남 [[마누엘 1세 콤네노스]]는 동부와 서부 양방에서 주변 지역을 공격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하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예루살렘 왕국과 함께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침공했다. 마누엘은 여러 십자군 국가의 종주국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했고 안티오케이아의 공작 [[르노 드 샤티용]]과 예루살렘 왕 [[아모리 1세]]과 협정을 조인해 패권을 확보했다.<ref name="S">{{harvnb|Magdalino|2002|p=74}}; Stone, [http://www.roman-emperors.org/mannycom.htm Manuel I Comnenus].</ref>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여러 항구를 재장악하고자 1155년에 마누엘은 이탈리아로 원정대를 보냈으나 연합군 내홍 탓에 원정은 결국 실패했으나 1167년에 마누엘에 [[헝가리 왕국]]을 침공해 [[시르미움 전투]]에서 헝가리를 격파했다. 1168년에 아드리아 해 동안 대부분을 장악한<ref name="S372">{{harvnb|Sedlar|1994|p=372}}.</ref> 마누엘 황제는 황제와 여러 서방기독교왕국과 수차 동맹했고 [[제2차 십자군]]으로 하여금 제국을 별탈없이 통과시킬 수 있었으나<ref name="M67">{{harvnb|Magdalino|2002|p=67}}.</ref> 동부에서는 1176년에 마누엘 2세는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튀르크인에게 대패했지만, 패배한 손실은 이내 만회했고 익년에 마누엘의 군대는 "선발된 튀르크인들"을 무찔렀다.<ref name="B129">{{harvnb|Birkenmeier|2002|p=128}}.</ref> [[히엘리온과 레이모케이르 전투]]에서 튀르크 침략군을 섬멸한 로마 군대 사령관 요한네스 바타체스는 수도에서 군대를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군대를 자체로 모집 가능했는데 이는 로마 제국 군대가 아직 강력하며 소아시아 서부의 방어 제도가 아직 제구실하는 형편을 나타냈다.<ref name="B196">{{harvnb|Birkenmeier|2002|p=196}}.</ref>
1198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 사절]]과 [[회람]]을 통해 새 십자군 창설을 제의했다.<ref name="Norwich299">{{harvnb|Norwich|1998|p=299}}.</ref> 당초 이 십자군은 [[레반트]] 무슬림 세력의 중심지였던 이집트를 목표로 했다. 1202년 여름에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에 당도한 십자군은 예상보다 규모가 작았고 이집트로 가고자 고용한 베네치아 함대에 지불할 비용도 불충분했으며, [[도제 (베네치아)|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이끄는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집트와 밀접하게 교역하는 관계였으므로, 교황과 십자군 양자는 이해관계가 상이했다.<ref name="Br4Cr">{{백과사전 인용|title=The Fourth Crusade and the Latin Empire of Constantinople|encyclopedia=Encyclopædia Britannica}}.</ref> 베네치아는 십자군에게 함대 사용료를 지불하는 대신에 [[달마티아]]의 [[차라]] 항구를 장악할 수 있게 자신들을 지원하라고 제안해 승낙받았다. (이곳은 원래 베네치아의 종속 도시였으나 반란해 1186년에 헝가리의 보호하에 스스로 들어갔다).<ref name="BrC">Britannica Concise, [http://concise.britannica.com/ebc/article- 9383275/Siege-of-Zara Siege of Zara].</ref> 1202년 11월에 짧은 [[차라 공성전|공성전]] 끝에 차라 시는 함락되었다.<ref>{{harvnb|Geoffrey of Villehardouin|1963|p=46}}.</ref> 인노첸시오 교황은 베네치아의 이런 계획을 알고 거부했으나 묵살당했지만 십자군을 곤경에 빠뜨리고 싶어하진 않았으며 이 사람들의 과오를 조건부로 면제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ref name="Br4Cr" />
 
[[파일:Byzantium1215.jpg|섬네일|left왼쪽|260px|제4차 십자군 이후 제국의 분열. 1204년경.]]
 
[[샹파뉴 백작 테오발드 3세]]가 죽자 십자군의 지휘권은 [[호엔슈타우펜 왕가]] 출신의 [[슈바벤의 필립]]의 친구인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에게 넘어갔다. 보니파치오와 필리프는 모두 로마 제국 황족과 혼인했다. 필리프의 이복형제이자 폐위된 장님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의 아들인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도와줄 세력을 찾아 유럽에 와서 십자군과 접촉했다. 알렉시오스는 로마제국과 로마의 양 교회를 통합하고 십자군에게 은화 200,000 마르크를 지불하며, 십자군에 합세해 이 사람들이 이집트에 가는데 필요한 모든 물자를 보급하겠다고 제안했다.<ref name="Norwich301">{{harvnb|Norwich|1998|p=301}}.</ref> 인노첸시오는 십자군이 목표 이집트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한다는 계획을 알고 이 도시를 공격하지 말도록 명령했지만, 교황 칙서는 십자군 함대가 차라를 떠나고서야 도착했다.
 
==== 오스만 제국의 발흥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
[[파일:Constantinople 1453.jpg|섬네일|upright위오른쪽|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15세기의 프랑스 세밀화.]]
 
[[안드로니코스 3세]]가 죽고 내전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내전 (1341년~1347년)|6년간 이어진 내전]] 탓에 제국은 황폐화했고 1354년에 [[겔리볼루]]에서 지진이 일어나면서 오스만 제국(이들은 내전 당시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가 용병으로 부린 바 있었다)이 유럽에 발을 들이게 된다.<ref>{{harvnb|Reinert|2002|p=268}}.</ref> 로마 제국이 내전을 끝낼 즈음에 오스만 제국은 이미 세르비아를 무찔러 봉신국으로 삼았다. [[코소보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은 발칸 지방 상당수를 정복했다.<ref>{{harvnb|Reinert|2002|p=270}}.</ref>
=== 경제 ===
 
[[파일:September byzantinisch.jpg|섬네일|left왼쪽|250 px|[[9월]]의 우의적 묘사. 11세기경]]
 
로마 제국의 경제는 수백년간 지중해와 유럽에서 단계가 가장 발전되어 앞서 있었다. 특히 유럽은 중세 후기까지 로마 제국의 경제력을 따라가지 못했고 로마 제국에서는 서유럽과 달리 화폐 경제 제도가 발달하였다. 제국 행정부에서 발행한 금화 [[노미스마]]는 [[11세기]] 전반까지 높은 순도를 유지해 후세에 ‘중세의 달러’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나라에서 화폐로 유통되었다.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업종마다 길드를 이용한 국가에 의거한 보호와 통제가 두루 미쳤으므로, 국영 공장에서 독점으로 제조된 견직물이나 귀금속 공예품, 타국과 한 무역이 제국에 많은 부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이는 곳’이라고 칭해질 만큼 크게 번영하였다.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 거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무역망의 중심지였으며, [[비단길]]의 서측 관문이기도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7세기에 아랍인이 쳐들어오기까지 제국은 세계에서 최강한 경제력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출처|날짜=2013-06-18}} 아랍인의 정복으로 부는 역전되어 로마 제국은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다. 콘스탄티노스 5세의 개혁(765년경)으로 제국은 부흥해 1204년까지 발전하였다. 10세기에서 12세기 말까지 로마 제국은 화려를 과시했고 여행자들은 수도의 부에 깊이 인상받았으나 경제상 재앙이었던 [[제4차 십자군]]으로 일체가 달라졌다.<ref name="M532">Magdalino ''in Laiou'' (2002), [http://www.doaks.org/EconHist/EHB20.pdf 532] {{웨이백|url=http://www.doaks.org/EconHist/EHB20.pdf |date=20080625192523 }}<!-- application/pdf, 531963 bytes -->}}</ref> [[팔라이올로고스 황조]]는 경제를 회생하고자 노력하였으나 후기 로마 제국은 국내외 경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12세기 이후로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의 상공업 발전에 밀려나 제국 내 산업은 쇠퇴헤 해군력 제공을 담보로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에 무역 특권 부여로 무역 이익도 잃은 제국은 쇠퇴일로에 들어섰다. 점차 제국은 교역과 가격, 귀금속 유통에 영향력을 잃었고 어떤 학자들은 화폐 주조권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ref name="M806">Matschke (2002), [http://www.doaks.org/EconHist/EHB37.pdf 805–806] {{웨이백|url=http://www.doaks.org/EconHist/EHB37.pdf |date=20080625235853 }}<!-- application/pdf, 262093 bytes -->}}</ref>
법 분야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개혁은 [[법리학]]의 발전에 분명한 영향을 끼쳤으며, [[레온 3세]]의 ''에클로가''(Ecloga)는 슬라브 세계의 법 체제 성립에 영향을 끼쳤다.<ref>Troianos, Velissaropoulou-Karakosta, 1997, p.340.</ref>
 
[[파일:Mudil Psalter.jpg|섬네일|right오른쪽|120 px|무딜 시편(Mudil Psalter). [[콥트어]]로 된 최고인 완전한 시편이다. (이집트 카이로 [[콥트 박물관]])]]
[[파일:Codex Armenicus Rescriptus.jpg|섬네일|right오른쪽|120 px|아르메니아 칙답서(Codex Armenicus Rescriptus). 아르메니아와 시리아의 전례식문을 담는 6세기·10세기 양피지 문서.]]
[[파일:Joshua Roll.jpg|섬네일|right오른쪽|120 px|[[여호수아 두루마리]]. 10세기에 그리스어 필사본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된 제작으로 추정된다.([[바티칸 도서관]])]]
 
=== 언어 ===
 
{{전거 통제}}
 
[[분류:1453년 해체]]
[[분류:유럽의 옛 나라]]
[[분류:비잔티움 제국| ]]
[[분류:1453년 해체폐지]]
[[분류:유럽의 옛 나라]]
[[분류: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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