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포로수용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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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수용소는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구역으로 나뉘었고, 1개의 단위구역(enclose)에는 6,000명을 수용하였다. 각 구역의 하부 구조로 수용동(compound)이 있었고, 전체 수용소는 4개의 구역과 28개의 수용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 계곡에는 제6구역, 동부 계곡에는 제 7, 8, 9 구역이 설치되었다. 또한 이러한 시설과 규모를 자체 지원할 수 있는 비행장, 항구, 보급창, 발전선박, 병원, 도로, 탐조등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 수용 ===
[[파일:Geoje-POW Camp1.JPG|섬네일|220px|디오라마관 - 포로의 노역]]
[[1951년]] 6월까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과 중공군 포로 2만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였고, 그 중에는 여성 포로도 300명이 있었다. 그러나 강제징집 등의 이유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와 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 간에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고, [[1952년]] [[5월 7일]]에는 당시 수용소 소장이었던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석방되는 등 냉전시대 이념갈등의 축소판과 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다.
 
=== 부상병 포로의 교환 ===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만 1년만에 휴전회담이 시작되었고, 이 때 포로 교환 문제가 논의되었다. 북한은 포로 전원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으며, 포로 교환의 방식이 서로 달라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였다. [[1953년]] 2월에 부상당한 포로를 우선 교환하자는 유엔 측의 제안에 북한이 수용을 함으로써 《상병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에 북한, 중공, 유엔이 합의를 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4월 20일]] 부터 [[5월 3일]]까지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쌍방 간에 포로교환이 이루어졌다. 이때 교환된 포로의 숫자는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684명, 북한과 중공군을 포함한 북한 측이 6,670명이었다.<ref>{{웹 인용|url=http://www.geojeimc.or.kr/sub.html?w=body_03_01_2&style=03&bo=03_01_6_28|제목=상병포로교환|확인날짜=2010-06-18|저자=거제시설관리공단|날짜 = |출판사= |원본일자 = |인용= }}</ref>
 
=== 포로들의 석방과 송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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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분류:대한민국의 군사·전쟁 박물관‎박물관]]
[[분류:대한민국의 군사 시설]]
[[분류:한국 전쟁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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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52년 대한민국]]
[[분류:1950년 설립]]
[[분류:1953년 해체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