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털루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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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상자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워털루 전투'''({{lang|en|Battle of Waterloo}}; {{llang|fr|Bataille de Waterloo}})는
1815년 3월, 나폴레옹이 다시 황제가 되자 수많은 유럽 국가들은 그에 대항해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고, 그 후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웰링턴과 블뤼허의 군대는 프랑스 북동부의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그들으 각개격파하여 다른 연합군이 그들과 협조하여 프랑스를 침공하려는 것을 차단하려고 했다. 6월 16일 나폴레옹은 [[리그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성공적으로 공격했고, 프랑스의 일부 군대는 [[콰트레바스 전투]]에서 영국 주축의 연합군을 공격 중이었다. 콰트라바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프로이센 군의 패배로 웰링턴은 17일에 워털루로 이동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웰링턴과 나란히 후퇴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그의 병력 제3파를 보냈다. 이 후퇴 동안 프로이센의 선봉과 프랑스군은 [[우아브르 전투]]를 벌였다.
프로이센군이 그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웰링턴은 몽생장의 브뤼셀 도로에서 전투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곳에서 18일까지 프랑스군의 반복되는 공격을 막아냈고, 이 무렵 격렬한 전투 끝에 이곳에 도착한 프로이센군이 영국군을 지원했다. 저녁에 나폴레옹은 마지막 예비군인 [[제국친위대]]를 투입해 마지막 공격을 가했지만 영국군은 이들을 다시 격퇴시켰다.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의 우익을 돌파하면서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 주축의 연합군 역시 중앙에서 반격을 개시했고, 프랑스군은 궤멸했다.
워털루 전투는 [[워털루 전역]]과 나폴레옹 전쟁의 결정적 전투였다. 웰링턴에 따르면 "전투는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본 것 중 가장 아찔한 것"이었다..<ref>[[q:Arthur Wellesley, 1st Duke of Wellington|Wikiquote:Wellington]] citing ''Creevey Papers'', ch. x, p. 236</ref> 4일 후 나폴레옹은 폐위되었고, 7월 7일 연합군은 파리에 입성했다.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는 나폴레옹의 통치를 끝냈고, 그의 [[백일천하]]도 이 전투를 통해 끝났으며, [[프랑스 제1제국]] 또한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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