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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귀국, [[여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 [[1924년]] [[5월]]의 [[조선여성해방동맹]] 등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조선공산당]] 조직에도 참여하여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신간회]]와 [[근우회]] 등의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동아일보]]의 기자와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6년]] [[5월]] 도미했으나 이듬해 귀국,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 여학생들 선동을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36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 [[민족혁명당]], [[조선독립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서울]]로 귀국했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38도선]] 이북으로 월북, 남북을 오가며 활동하던 중 [[1948년]] [[4월]]의 [[남북 협상]]에 북측의 여성계 대표로 참여한 뒤 [[북조선]]에 정착했다. 그해 [[9월]]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되고, 38선 이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 단독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내각 [[문화선전상]]과 [[보건성]] 부상, [[1949년]] [[보건부|보건상]], [[1959년]] [[법무부|사법상]]과 [[최고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연안파]] 숙청 때는 전 남편인 [[최창익]]을 비판하여 숙청을 면하였다. [[1965년]] 정계에 복귀,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중앙재판소|최고재판소 소장]]에 복직하였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되고 그해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에 선출된 뒤, 제6,7,8기 [[최고인민회의|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연임, 재선되었다.
 
그는 사랑 없이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고, 사랑 없이도 결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변호사]] [[허헌]](許憲)의 맏딸이며, [[조선공산당]]의 간부인 [[임원근]], [[송봉우]], [[중국]] [[연안]](延安)의 [[조선독립동맹]]의 부주석 [[최창익]]의 부인이고, [[신일룡]] 등의 연인이었다. 본명은 허정자(許貞子), 다른 이름은 허정숙(許貞淑) 또는 허정숙(許正淑), 필명은 수가이(秀嘉伊)이고 가명은 정은주(鄭恩珠), 별칭은 '조선의 [[콜론타이]]'이다. [[1945년]] 이름을 정자에서 정숙(貞淑)으로 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