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헌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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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년 가을에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가 헌제를 맞이하니, 이때부터 헌제는 조조의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한편 원소의 부하인 [[저수]](沮授)가 당시 중국에서 가장 강한 군벌로 성장한 [[원소 (후한)|원소]](袁紹)에게 헌제를 모실 것을 원소에게 조언하였으나, 헌제가 동탁 덕분에 황제에 올랐다는 것 때문에 원소는 헌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헌제를 맞이하지도 않았다.하지만 한편에는 헌제가 조조에게 보호받는 처지가 되자 헌제를 맞이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원소에게 마찬가지로 조조에게도 역시 헌제는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권력을 위한 수단과 명분에 불과하였다. 조조가 헌제를 확실하게 휘어잡게 되자, 조조는 장양의 부하였던 [[동소]](董昭)의 조언을 받아들여 도읍을 자신의 근거지와 가까운 허(許)로 옮기어 궁을 짓고 허도(許都)로 이름을 고쳤다. 이때부터 헌제는 조조와 그 무리들에게 둘려쌓여 황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고, 조조의 요청이 있으면 재가만 해주는 신세가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여포에게 패해 조조에게 의지하러 허도에 왔을 때 그가 전한 황실의 핏줄임을 알고 유황숙(劉皇叔)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헌제와 유비는 조상이 한경제의전한 경제의 아들들이다. 헌제는 경제의 아들인 정발왕의 후손이고 유비는 경제의 일곱 번째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다.
 
날로 강해지는 조조의 세력을 견제하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200년]] [[정월]]에 헌제는 동승에게 조조를 죽이라는 밀서를 내리지만, 결국 조조에게 발각되어 동승을 비롯한 무리를 죽고 헌제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이 과정에 유비와 마등의 세력이 살아남는다.) 한편 원소는 하북을 통일한 뒤 조조를 치기 위해 남진하지만, 조조군은 관도에서 원소군을 격파했다. 유명한 [[관도대전]]이후 조조는 원소가 병으로 죽고 후계자 문제로 인한 분쟁이 일어난 틈을 타 하북을 장악하고 [[승상]]의 지위에까지 오르지만, [[적벽대전]]에서 패해 천하통일의 기회를 나중으로 미루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