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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인 ==
===기해박해===
[[1831년]] 교황청이 조선을 독립교구로 선정하여 [[앙베르]], [[피에르 모방|모방]], [[샤스탕]] 신부를 [[조선]]에 파견해 몰락한 양반을 중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조선의 양반들은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와 [[기독교]]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여 천주교를 금지하였으며, [[1839년]]에는 천주교 박해사건 중 하나인 [[기해박해]]를 일으켜 3명의 프랑스 천주교 신부를 처형했다(. 하지만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천주교는 확장되었다).
 
[[흥선대원군]] 자신은 본래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를 탄압할 생각은 없었고,<ref>{{서적 인용|제목=한국 기독교회의 역사(상)|저자=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쪽=80|확인날짜=2008-07-30 }}</ref> 반감도 없었다.<ref name="글로벌">《[[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종교의 새 기운/천주교의 전파와 교세 확대#병인사옥|병인사옥]]〉</ref> 오히려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인 천주교를 통해 프랑스 등의 [[서구 열강]]들과 교류를 할 생각을 했고, 개인적으로도 천주교는 부인 [[여흥부 대부인 민씨]]의 종교이기도 했다. 천주교를 이용해서 [[프랑스]]와의 주선을 통해, 남하하는 [[제정 러시아]]를 막으려고 하였던 것도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묵인한 이유 중 하나이지만 국외 정세에 의해 천주교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프랑스군이 청나라의 베이징을 점령한 사건으로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이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천주교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