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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년]] 6월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폐모론을 강하게 반대하다가 대북파의 탄핵에 몰렸으며, 병을 얻어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물러났다. 그의 일족인 [[이이첨]]이 대북의 영수였으나 그는 인목대비의 폐모와 영창대군의 사형을 극력 반대하였다.
 
이후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는 상소와 함께 병을 이유로 [[의정부]][[영의정]]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모든 관직이 삭탈되었다. 1613년 10월 사저가 있던 당시의 [[경기도]] [[광주군 (경기도)|광주부]](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사제(莎堤) 마을)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인조 즉위복권되었다. 후 복권되었으며, 경기도 포천시에 위치한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 사후 ===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623년]] [[인조 반정]] 뒤에도 불이익이나 추탈을 당하지 않았다.
 
경기도 포천시에 위치한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묘는 현재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번지에 있다.